다음 글은 동생 신부(방경석 알로이시오)의 부탁으로
형님 신부(방윤석 베르나르도)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인 2012년 8월에 쓰신 글입니다.
천국 가는 여행 준비 피정을 마치면서
-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드리는 글 -
서산석림동 본당 주임신부 방윤석 베르나르도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보고 싶어 8월 19일 제 영명 베르나르도 축일 행사를 하려 하였으나 의사의 권고에 따라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2012년 4월 11일 정기진단 시 대전성모병원에서 식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본당 설정 25주년을 맞아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저를 건강체로 알고 있던 모든 신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정밀검사 결과 암이 거의 스무 군데나 퍼져 1년 생존율 40% 이하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항암치료와 방사능치료를 하느냐 아니면 자연 치료방법인 활원운동으로 하느냐는 큰 갈등에 빠졌습니다. 병행치료가 안 된다 하여 활원운동으로 과감히 택했습니다. 저는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암으로부터 오는 통증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제 일생동안 베풀어 주신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선 저는 전쟁 중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피난 가시다가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생가를 모릅니다.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전쟁 중 어린 갓난아기를 살려주신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드려야 되겠습니까? 저는 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지냈습니다. 땔감을 마련할 때면 독사, 송충이, 벌이 우글거리는 데서 나무를 했습니다. 그런 위험에서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시골 생활을 통하여 일생 아름다운 추억과 마음의 고향을 갖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신학교를 고등학교 때 입학했습니다. 77명이 입학하여 졸업자는 20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수시로 쫓겨났습니다. 저는 여기서 자신을 억제하는 것과 인내력을 키웠습니다. 이 얼마나 큰 덕행입니까? 대신학교 입학하자마자 아버님의 실직으로 부제가 될 때까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방학 때 공사장을 다니며 막노동도 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품팔이로 벌어다 주시는 돈으로 학교를 겨우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난을 체험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저를 사제직에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마침 군종교구에서 군종장교 후보생 제도를 신설했으니 지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사병으로 군대 안 가고 신부 된 뒤 장교로 임명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 때 군대 3년 안 가고 6년 만에 신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나이 25세였습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감사할 일입니까?
저는 지난 사제생활 37년간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사제생활 37년을 통하여 따뜻한 마음과 온갖 열정으로 사목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청양 줄무덤 성지 조성 작업과 해외교포사목도 했었습니다. 홍보국장 교구 산하 12개 사도직 단체를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쌍심지 초를 만들어 특허청에 실용신안 등록도 했습니다. 대전평화방송FM을 설립하였고, 천주교 주일 강론 ‘3분간 전화로 듣는 말씀의 전화’를 개설해서 94년부터 암 판정 시까지 한주도 거르지 않고 운용해 왔습니다. 아무도 이루어낼 것 같지 않았던 사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제 암 투병을 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과 나와의 만남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근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면서 면형무아((麵形無我: 성체 안에 내가 녹아듦)를 이루고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하느님 품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저는 일생을 하느님의 은총과 감사에 싸여 지냈습니다.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아직 주님의 부르심은 없지만 저의 일생과 특히 사제생활 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유흥식, 김종수, 경갑룡 주교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특히 일생동안 깊은사랑을 주신 경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많이 사랑해 주신 대전성모병원 관계자들에게 깊은 감사드립니다. 너무나도 따뜻하게 저를 대해 주셨습니다. 가능하다면 안구 등 기증하겠습니다. 수많은 교우분들의 끊임없는 기도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간병인들께 감사드립니다.
어느 시인처럼 저도 소풍을 나왔다가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죽어도 주님의 것이고 살아도 주님의 것이니...
조선시대 순교자 백정이었던 황일광 알렉시오는 ‘세상에서 나는 이미 천국을 맛보았는데 순교하면 그보다 더한 천국이 영원히 지속된다니 얼마나 그 기쁨이 크겠는가?’하면서 웃으면서 순교했습니다. 저도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갑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루카 22,42)
아멘. 감사합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만납시다.
2012년 8월 일
고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 추모(2012년 8월 16일 선종. 8월 20일 영명축일)
동생 방 알로이시오 신부님, 선종 2주기 추모미사 집전
2014년 8월 16일(토) 오전 11시 대전가톨릭대학교 하늘묘원에서 선종하신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 2주기 추모 미사가 있었습니다. 동생인 방경석 알로이시오 전민동성당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가족들과 전민동성당, 온양 신정동성당, 가수원동성당 신자 60 여명이 참석했습니다. 방 베르나르도 신부님은 청양성당 주임으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을 발견하여 청양 다락골 성지 조성의 기틀을 놓으셨으며, 대전 평화방송 설립의 중추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한 17년간 ‘말씀의 전화’로 1000여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교구 사도직 단체를 맡으셔서 많은 신부님들이 기억하고 계시고,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모범으로 따뜻한 추억을 남겨 주셨습니다. 방신부님 가족은 고조 때부터 이어온 신앙 가족으로 외삼촌 김 필립보 신부님도 묘원에 함께 계시어 이날 두 분 신부님을 위한 추모 미사와 연도를 함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글. 전민동성당 윤선경 수산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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