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정의철 다마소 신부님의 전례학 강의 2교시 내용입니다.

2015-1-3 토요일 오후 2시25~3시10분, 가톨릭대학 진리관 3층 대강당

전례학  2교시, 가톨릭교리신학원 2015년 1월 동계연수


아래 내용은 필자의 기록과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기에 실제 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강연자 정의철 신부님의 의도와 다르게 읽힐 수도 있읍니다. -필자 주 



전례학 2 교시

자연스러운 전례와 전례스캔들

너 틀렸으니까 다시해! 옛날에는 화려하고 장엄한 예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실수한 복사를 꾸중하기도 하고, 성가대를 향해 '왜 그리 빠르냐' 지적하면서 사람들이 잘 나가다가 작심해서 나가다가 사제의 그런 발언에 일이 어그러집니다. 이것이 '전례 스캔들'입니다. 우리가 전례에서 스캔들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더더욱 전례봉사자에게 필요한 일이죠. 말씀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내 입으로 봉독을 통해 하느님 말씀 잘 받아들일지 고민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다급하게 돋보기를 끼었다 빼었다 하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가능하면 전례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 물질, 동작

말, 물질 그리고 전례 안에는 동작이 있습니다. 세가지입니다. 동작이 얼만큼 중요하냐면, 초기 사도시대에는 미사성제에서 동작이 그 용어가 된 중요한 게 있습니다. 미사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이 거양성체(擧揚聖體)입니다. 여러분 거양성체는 사실 없어도 되는 겁니다. 

거양성체

왜 생겼나면 13세기 불란서에서 성체성사 변화에서 반박하는 학자들에게 교회는 대응하려고 이 예식이 들어옵니다. 여러분 아다시피 미사는 신자들 등지고 미사를 지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와가지고 신자들은 능동적 참여를 못하고 사제 혼자서 다하고, 신자가 하는 건 묵주기도 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보지도 못해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었다니 보고 싶은 열정이 생겨서 그 열정을 채우려고 나온 예식이 거양성체, 성체거양. 

자 보십시오 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면, 그렇게 아주 중요한 예식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린 중세때 신앙심을 강조하다보니, 이 들어서 보여주는 성체, 미사에서 중요한 순간은 거양성체로 배워왔고 인식이 남아있는 겁니다. 없어도 사실 큰 건 아닌데 . . .

2015년 1월 3일(토) 오후, 서울 가톨릭대학 진리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전례학 특강 모습



한 빵에서 쪼개는 게 미사의 의미

미사 안에서 동작이 너무 중요하니 미사 용어가 된 겁니다. 그게 빵을 쪼개는 겁니다. 빵을 쪼갠다는 건 나눔을 의미하죠. 한 빵에서 쪼개는 게 미사의 의미. 성체성사의 의미 곧 예수님 의미. 자기자신을 그야말로 찢어지고 으스러지고 남에게 먹히는 존재로 삶을 사신 분. 그래서 그 빵을 쪼갠다는 건 동작 하나로 예식이 가능하여 그것이 4세기부터 미사란 용어가 쓰였는데 초기부터 빵의 나눔이란 용어가 쓰인 겁니다.

잘 들어야 

전례 안에서 필요한 자세는 이러한 것들을 표징을 통해 드러내보여주시니,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통해서 하느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들어야 올바로 답해야 합니다. 

잘 봐야

두번째는 물질이나 동작을 통해 드러내보여지니 잘 봐야 합니다. 예전에는 사제가 모든 걸 다하니, 제대에도 감실이 제대 중앙에 딱 올려놓고, 제대장식 꽂꽂이도 제대 위까지 올려서 화려하게 하니 제대 위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젠 사제들이 하는 모든 동작을 잘 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잘 보려고, 제대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꽃꽂이도 규정이 바뀌어서, 그렇게 가리면 안되는 겁니다. 심지어 촛대도 양 옆으로 세우는 촛대로 되었죠. 

잘 말해야

세번째는 잘보고 잘 듣고 하느님께 영광찬미 드리니 잘 말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화두를 터트린다면 기도 화답을 한다면 세가지가 전례의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보고 잘 듣고 잘 말하는 세가지 중요한 것이죠. 이것만 마음에 두시면 달라질 수 있어요. 

신자 유형 세가지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에 대해 세가지 유형이 있어요. 첫번째는 벙어리 신자. 처음부터 전례에 들어와서 입벙긋 안합니다. 특히 남성 신자분들. 내가 전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해도 올바른 게 아닙니다. 두번째는 앵무새 신자가 있죠.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대로 따라합니다. 신앙습관대로 잘 따라 소리내지만 뭐가 부족하냐? 뭘 모르고 하는 거죠. 예식 의미 모르고 그저 따라하면서 잘못하면 형식적 신앙인, 기복적 신앙인이 됩니다. 전례의 기쁨을 모릅니다. 세번째는 맹꽁이 신자입니다. 여기서 맹꽁하면 또 맹꽁하는 거죠. 

우리는 이런 신자가 되지 말아야 겠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룩하신 일들을 인간이 잘 알아 듣도록 인간 사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하는 게 전례입니다. 전례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공동체의 사적이 아닌 공적인 행위입니다. 공적이란 것은 전례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 개념

공적인 행위라는 것, 하느님 백성,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해해 줘야 할 건 그리스도의 신비체 개념, 이건 누가 사용한 개념인가? 바오로 사도가 썼던 용어입니다. 그리스도 신비체란 몸은 몸이지만 일반 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세례 받은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그 지체들이 아프면 몸 자체가 건강한 상태가 아니죠. 전례에서도 그 지체 역할하는 사람들, 사제, 수도자들, 평신도들, 특별 봉사하는 전례봉사자들 등 자기가 맡은 지체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할 때, 그럴러면 자기 역할이 뭔지 미리 잘 알아야죠. 그래서 올바르게 되려면 그것을 잘 준비해서 할 때 올바르고 아름다운 전례를 이룬다는 거죠, 

말씀선포하는 이는 제단 위에 올라와서 말하죠. 해설자는 밑에서 하죠. 그런데 보통 해설자가 후까시를 딱 넣죠. 아닙니다. 말씀 선포는 하느님 말씀의 전달이죠. 인간의 말로 자연스럽게 전달하기 위해 말씀봉사하는 이의 좌석을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독서대 옆에 자리 마련이 우선이죠. 그런데 자리가 잘 마련되지 않는다면, 본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독서자가 올라가서 독서대에 너무 일찍 서있는 것도 일종의 전례스캔들이랄 수 있어요.

전례 안에서 공적으로 움직여야

또 선포할 때 듣는 자세는 앉는 자세인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어디 하느님 말씀을 건방지게 앉아서 듣느냐 혼자 벌떡 일어나거나 양팔 들고 듣는 것도 전례를 흐트러놓으니 전례스캔들입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같이 해야죠. 전례 안에서는 공적으로 하는 겁니다. 자기를 사적인 것을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겁니다. 전례 안에서는 개인적인 신심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죠. 

전례의 마지막 정의로 공적인 행위라는 것

전례 안에서 무엇이 이뤄지고, 전례 목적이 뭐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천년 전에 하셨던 것을 잘 알아듣기 위해 표징을 이용하니 잘 듣고 잘 보고 잘 말하는 것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규정들이 예전에 생겼지만, 본질은 잊고 외적인 형식에 집중을 쏟는다면 문제입니다. 중세가 그런 거죠.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그렇게 생각해왔던 거죠. 전례에서 지켜야 할 규정을 모은 것이 전례라는 게 아니죠. 

제가 1983년 유학 떠났는데, 당시 전례에 대한 개념 없었어요. 유학 가기 전에 선배 신부님들 인사하는 데 선배들 전례 그거 아무것도 아냐. 잘만 배워오면 돼. 별것 아니구나. 의전 부분에만 중점을 두었던 거에요. 가서 보니, 그게 아니라 근본적인 전례의 의미를 찾으니 인식이 달라진 것이죠. 

저도 다녀와서 교구에 의전직위를 하게 되죠. 그러면서 너무 하다보니 딱딱하고 틀리면 뭐라 하고 그러다보니 이게 아닌데... 제가 신학교 20년 있었는데, 이번에 교황님 오시면서 전례 맡으면서 외적 규정들보다는 본질적 부분 중점 두시구나, 그렇다고 너무 무시하면 안되지만, 그래서 전례원장이 항상 붙습니다. 의전이죠. 그럼에도 그걸 지키면서 교황님이 얽매이지 않는, 그런데 전례는 예식 거행하는 데 신경 많이 쓰지만,,, 조금이라도 전례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러면 이것이 전례 행위에는 신심행위와 전례행위로 구분할 수 있지만 엄격한 구분은 아니고, 어디가 우선일까요? 전례행위가 우선입니다. 

중심은 성사

가장 중심은 성사입니다. 준성사가 있고, 시간전례, 성무일도 있는데, 신심행위는 보완적이죠. 그런데 뒤바뀝니다. 전례행위 잘하도록 보완해야 하는데, 신심행위가 우선시되면 나쁘다기 보다 안하느니만 못하죠. 어디서 신심행위 있다고, 어디서 기적 일어났다면 그곳까지 우루루 쫓아가면서 정작 미사에 무관심하면 큰 문제죠. 그래서 성모님 발현 도시에 그런데 가요, 차 대절해서 갔다 와서 하는 얘기는 쓰잘데기 없는 얘기들입니다. '모생묵주로 해야 은총 많이 받는다.' 손가락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가톨릭은 미사 없으면 Nothing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미사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미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미사 만큼은 마음을 준비해서 잘 해야 하는데, 신심행위가 위에 서는 것은 전례행위에서 그런 맛을 드러내 보여줘야하는 데, 어떤 감정이나 자극을 줘야 빨려들어가는 데 전례행위는 그렇지 않죠. 예수님이 정말 나타나셔서 하면 다르지면, 오늘날 신앙은 감각적 신앙에 끌리면서 쉽게 자극받는 신심행위에 빠지고, 재미없는 전례행위에 무관심해지는 것이죠. 

여기도 성령운동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외적으로 치유한다거나 방언한다거나 그러면서 그냥 실제 하기보다 거기에 합리화시키는 느낌들, 그래서 엉뚱하게 사람들 잘못되게 만들고, 저도 대구에서 편지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생활에서 우선 두는 것에 우선 둬야지, 부수적인 것이 우선을 두면 안되는 거죠, 축일에서 등급 두는 것 대축일, 축일, 기념일, 등도 우선 둘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다섯가지 여러분이 아시고, 그러면 전례 잘 압니다. 

그리고 이제 전례에 대한 개념과 본질 설명하고 미사 전례 강의를 하겠습니다. 

미사에 대한 용어. 

지금 우리가 미사란 용어 사용하는데, 처음은 아니죠. 초기 사도시대는 어떤 동작 '빵의 나눔'이란 용어 '코라시오 빠니스'라는. 그 다음 어떤 동작보다 성찬례 안에서 이뤄지는 기도문이 용어가 된 것인데, 그리스도 영향으로, 에루페리시디아. 감사. 근본적으로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이죠. 그래서 그걸 미사 용어로. 또 하나는 찬미나 축복이란 용어로 에울로지아. 그 다음에 사도시대 때 미사를 바오로 사도의 언급에 따라, 주님의 만찬. 

미사란 용어 안에서 제사적 의미가 나오나요? 미사는 제사적 의미와 식사적 측면, 기쁨과 일치 의미 있는데, 여기까지 보면 제사적 의미 나타납니까? 전혀 아니죠. 그냥 이때까지는 미사는 식사적 측면이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에 제사적 관점 등장하죠. 희생제사, 사크라피시움, 오블라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나온 용어는 지금까지 쓴 용어로 미사란 용어 등장합니다. 그 이전 용어들은 미사의 중요한 의미 내포하는 데, 미사는 보내다 파견하다. 그게 중요하지 않죠. 제물, 희생, 제시. 감사 축복 등 내포하는데, 파견 보내는 건 끝나는 겁니다. 용어가 아님에도 쓴 것은 이 시대 어떤 회의를 할 때 원로원 회의할 때 군 모일 때 어떤 모임의 공식적인 파견사였죠. 그래서 그것을 활용하다가 정착된겁니다. 그것이 그대로 지금까지 사용하는데, 이 용어 적합은 감사입니다. 그래도 미사는 신자들이 이런 의미 다 내포한다고 이해해서 그냥 가는 겁니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감사 에우페리시아('에우카리스타'일 수도)를 많이 씁니다.

미사의 기원은 최후의 만찬


미사의 기원은 뭐죠? 최후의 만찬이죠.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사 어디 나오죠? 마르코복음 14장 보면 기사 있고, 바오로 전승에선 콜로새서인가요. 중요한 전승입니다. 마태오 26장, 루카복음에는 마르코 복음 최후를 베낀 것이고, 두개 중요전승은 마르코와 바오로 두 전승인데, 이런 걸 보면, 한결같이 분명 예수님 최후만찬이 어느때 이뤄졌죠? 

유대인 과월절 축제 절차가 복잡했던 것이죠. 일년 한 번 하는 것이니. 그러면 써놓아야 하는데,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 바치고,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 바치고. 그것은 성서 저자들이 의도했던 건 그당시 성찬례 미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보여주려던 것이죠. 성찬례 간단히 하고, 그 당시 성찬례 미사의 형태 보여준 것이죠. 이런 저런 예식들 들어오면서 7세기 오늘날 형태가 보여지면서 복잡해졌던 겁니다. 

그러나 사도시대는 들고 감사드리고 빵을 쪼개 나눈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당시 의미는 오늘날과 같지만, 당시 성찬례 의미는 회상제사입니다. 뭘 회상하죠? 중요한 게 뭐죠? 미사에서 이뤄지는 내면적인 본질이 뭐죠.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구원업적들을 계속 기도하고 기억하면서 그게 유다인들의 파스카 예식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파스카는 뭘 메모리하죠? 일년에 한번 하면서... 유다인 파스카 예식은 선조들이 하느님의 덕분으로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것, 동시에 맺은 계약을 그 안에서 새롭게 하는 것 그런 사명을 가지는 겁니다.

유다인들 파스카 예식은 먼저 개회식으로 먼저 준비를 하죠. 빵과 포도주, 쓴나물, 소금, 손 씻는거 양고기, 근본적으로 뭘 먼저 하죠? 축제에서 빠지면 안되면 술, 포도주를 놓죠. 그 잔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죠.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감사의 기도. 포도나무 열매에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기도후 마시죠. 그리고 예식이 바뀔 때마다 손을 씻는거에요. 그것이 그리스도교이 들어왔지만 새로운 의미로 만든 것이죠. 그리고 쓴 나물 먹고 본 예식 들어갑니다. 어떤 동작이면 큰 빵을 쪼갭니다. 상징적 의미죠. 이 빵은 우리 조상 고통의 빵, 주린 사람 누구나 먹읍시다. 우리는 여기 있지만 곧 약속의 땅으로 갈 겁니다. 주례자가 기도자를 통해서 메모리를 시키는 거에요.

그래서 어린이가 호기심이 물어봐요, 좀 다르잖아요? 왜 양고기 먹나요? 쓴나물 먹나요? 오늘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탈출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룩없는 빵이란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 누룩 부풀린 건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거죠. 그러하니 탈출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또, 쓴 나물은 선조들이 당했던 고통 생각하며 하나하나 질문에 답해줍니다. 참석한 사람들이 잘 들으라는 거에요. 그러면 메모리되어 누구에게 감사가 올라가나요? 그것이 시편 113-114편 터트리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일반적 식사들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포도주 잔 세번째 잔인데 그걸 차려놓고, 너희는 받아먹어라. 그리고 다시 한번 하느님께 알렐루야라는 115-116시편을 터트립니다.

중요한 것은 전례 안에서 사건을 기억하는 것

중요한 것이 전례 안에서는 기억하는 것,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거죠. 자연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 일어나는 거에요. 그리고 그게 참지 못한 마음이 환호로 터져나오는 겁니다.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미의 환호 터트리는 것이 전례 안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2교시 끝)

위 내용은 필자의 기록과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기에 실제 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강연자 정의철 신부님의 의도와 다르게 읽힐 수도 있읍니다. -필자 주 

젊은 시절의 정의철 다마소 신부님 모습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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