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본질을 바꾸는 연구와 '지배받는 지배자'
'연구'는 대학의 우수성을 증거하는 단어인가?
이공계는 대학의 본질을 어떻게 바꾸었나
대학의 인문학이 포스트 모던 류의 무절제한 논의로 스스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던 가운데, 대학의 이공계 분야는 과연 진리와 학문을 추구하는 대학의 이상을 지켜왔는가? 인문학을 대신해서 비판적 지식의 본령을 지켜왔던가? 오히려 이공계 분야는 대학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본질적 변화의 핵심에는 '연구'라는 개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구'라는 개념은 미국 대학에서 강력하게 형성된 개념이다. 그리고 미국대학을 숭배하는 한국대학도 사정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한국 대학의 '연구주역'들인 교수들의 사정을 살펴본다.
수도권 대학의 70~90%가 미국대학 박사 출신
우리나라 대학가에서 가장 귀중하게 모셔지는 학벌은 미국대학 출신이다. 사회과학분야에서 수도권 대학의 교수들은 70% 이상이 미국 박사 출신이라는 통계가 있다. 어떤 통계에서는 90%라는 말도 있다. 이공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교수신문이 2013년 상반기 조사현황에서도 보면, KAIST의 2013년도 상반기 신임교원 17명 중에서 13명(76.5%)가 미국 박사이고, 영국박사와 일본박사가 각각 1명씩, 국내 박사가 2명이라고 한다. 포스텍은 8명 중 6명(75%)이 미국 박사 출신이라고 한다.
국내 박사 63.1%ㆍ美 박사 24.0% … 3명 중 1명은 ‘여교수’ |
2013년 상반기 신임교수 임용조사 … 교수신문 2013.4.22 |
미국 대학원에 유학 가고 싶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대학은 대체로 미국에 소재한 것들이다. 그것은 바로 미국 대학들이 세계2차 세계대전 이후로 눈부신 발전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전은 전쟁과 냉전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시작으로 냉전시대에 이르기까지 군사산업에 대한 긴밀한 관계를 '(군학) 연구'라는 미명으로 구축해왔던 것이다. 대학이 국가발전과 국가경쟁의 한 축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군학' 연구의 경험이 '산학' 연구로 변신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대학 모습니다. 우수한 대학이거나 우수해지려는 대학일수록 기업과 산업분야의 연구를 경쟁적으로 떠맡으려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자본가와 소비자로 이분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과 소비라는 획일적인 구분의 세상 속에 오히려 더욱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연구, 리서치 개념은 어떻게 대학평가의 기준이 되었나
그리고 그러한 경쟁적 달리기에서 표방되는 단어가 바로 '연구'이다. 영어로 '리서치'라는 개념이 이공계에서 도입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는 인문학 분야에서도 '연구' 곧 리서치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었다. 게다가 연구중심대학(리서치 대학)이란 개념은 대학의 우수성을 증거하는 단어처럼 인식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수들의 학문적 자세는 곧 '연구'와 등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리서치(Research), 곧 '연구'라는 것은 증거를 발견하고, 그 증거나 정황 등에 대한 기술적인 사고와 증명을 통해 상황을 분석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개념이다. 인문학적 공부에 적용될 고유한 느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문학과 연구의 차이점
서보명의 책 51쪽에서 보면, 인문학 공부를 나타내는 말은 '학문'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영어로 Scholarship이란 표현과 어울린다고 말한다. 인문이라는 학문적 언어가 고백과 증언의 언어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그래서 Professor(교수)와 Professional (전문가)가의 임무는 Profess 곧 '공언'이나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인문학적 관점에서 Profess라는 뜻은 지식의 창출이나 기술적 능력과는 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고백적 증언은 계산적인 가치로 환산될 수 엇고, 진리를 명확한 증거를 구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뢰'라는 뜻의 Trust도 True와 어원이 동일하다.
Professor는 Researcher가 아니라고 서보명은 말한다. 교수가 곧 연구자라고 동일하게 취급되면 인문학도 '인문학연구'를 한다는 형식에 구속된다. 각주를 다는 작업, 인용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는 '표절'(Plagiarism)과도 연결된다.
<지배받는 지배자>를 주목한다
한편, 이 독후감을 쓰면서 추가로 소개하고 싶은 책이 한 개 더 있다. 그것은 바로 2015년 5월 11자로 발간된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책이다. 43세의 경희대 사회학과 부교수 김종영 씨가 1999년부터 미국 유학생 50명을 심층인터뷰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김종영 (지은이) | 돌베개 | 2015-05-11 | 정가 16,000원 | 반양장본 | 318쪽 | 223*152mm (A5신)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사회학자 김종영은 15년간 미국 유학현상과 유학파 지식인의 실체를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노력의 테마는 '미국 유학파 엘리트는 어떻게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 학계와 기업에서 어떻게 그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 기득권을 유지하는 지를 탐색한 것이다. 여기서 <지배받는 지배자>의 저자는 부르디외의 계층이론을 빌려쓴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 지배자들이 사실상 그들의 출신(미국 유학파)으로 인하여 미국 학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2008 - 현재 경희대학교 조교수, 부교수
2006 - 2008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2005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사회학박사
열등한 아시아인종 유학생에서 금의환양한 엘리트가 되기까지
이를테면 한국에서 껌 좀 씹는다는 교수들 중 많은 이들이 사실은 미국 유학시절에 제3세계 인종의 설움을 겪었을 것이지만, 미국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포장하여 한국에서는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출판된 이 <지배받는 지배자>, 한국 엘리트가 사실은 지식생산자라기보다는 '지식수입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실린 이 책이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을 쓰는 자리에서 소개하는 까닭은 미국 대학 역사의 끝자락에 한국 대학의 역사가 껌딱지처럼 붙어있기 때문이다.
8만명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유학생 3위
위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는 국가대표급 지위였다. 박사만 따오면 대학교수를 쉽게 하던 시절도 있었다. 욕망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길에 통과해야 했던 미국 유학의 꿈은 대한민국을 한 때 미국 내 유학생 1위의 국가로 만들기도 했으며, 현재도 여전히 8만명 가량의 한국인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오늘날 1위는 급성장 중인 중국(27만명)이 차지하고, 2위가 인도로 11만명이고, 한국이 3위, 사우디아라비이가 7만명으로 4위이다. 2014년 7월 8일 현재로 미국 이민세관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전체 유학생 숫자는 96만명이고, 그 중에서 아시아 국가 출신이 72만명으로 전체의 75%를 차지한다고 한다. 특히 1위부터 4위까지가 약 53만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셈이다.
2014년 7월 8일 미국 이민세관국이 발표한 미국내 유학생의 전체 숫자는 96만명이고
그 중 한국은 8만명으로 세번째로 많은 나라에 속한다.
<지배받는 지배자>를 주목하는 이유
<지배받는 지배자>의 저자가 분석하는 내용 중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즉, <대학의 몰락>에서 말하고자 하는 [연구, 곧 리서치]의 개념에 대한 접근이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지배받는 지배자>의 저자 김종영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학벌은 학사와 박사 학위로 이중적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이건 맞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국내 학사학위가 학사 분야에서 최정점의 지위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사회를 학벌사회라고 했을 때 작동되는 쪽수의 다다익선이 함께 작동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 하버드 출신보다는 서울대 출신이 훨씬 더 많다는 것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이중적 서열화의 2단계가 바로 대학원 출신을 말한다. 대학원 출신을 말할 때는 국내 명문대를 마치고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를 가장 높이 쳐준다. 숭미사대주의의 학문적 시스템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경쟁으로 대학 풍토를 바꾼다는 순진한 생각
조선일보의 신간 서평기사를 보면, 김종영은 "한국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의 비합리성을 끈질기게 비판했지만, 정작 진보든 보수든 자식이 속한 대학과 지식공동체를 가학하게 비판하고 변화를 요구한 사람은 드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존의 종합대에서 연구중심대학으로 재편되고 연구 경쟁이 전국적 차원으로 일어날 때 대학 풍토도 달라질 것"이라는 그의 결론은 어쩌면 상식적이다.>라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책을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연구경쟁이 전국적 차원으로 일어날 때 대학 풍토도 달라질 것"이라는 결론이 상식적>이란 표현이 매우 비상식적으로 들린다. 연구경쟁이 전국적 차원으로 일어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란 사실을 저자가 과연 모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美 '유학파 열등생' 어떻게 한국의 엘리트가 됐나 ... 신간서평 ... 조선일보 2015.5.18
중소도시의 병원이 서울 대형병원과의 의료경쟁에서 이길 수 있나?
서울의 대형 병원과 지방중소도시의 병원이 의료경쟁을 벌여서 지방의 병원이 승리할 수 없다는 상식으로 접근한다면, 위의 결론은 별로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의 몰락>의 저자 서보명이 정의한 '연구'의 개념에 따르자면, 기본적으로 연구는 '학문'이나 '공부'라기 보다는 '군학협력'이나 '산학협력'을 위한 도구적 용어이다. 그래서 그런 연구의 동기는 더러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것이고, 그 협력모델이 진화하여 기업자본주의의 도구로 학문이 변질된다는 주장의 맥락에서 '연구'란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구비와 어마무시한 연구장비가 필요하다. 정부의 막대한 공공 자금이 지원되는 연구가 아니라면 연구성과를 쉽사리 낼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구비는 주로 서열화된 대학 순서에 따라 상위권 대학들에게 더 많이 주어지는 경향도 존재한다.
'상식적'이란 결론에 대한 다른 견해
그런데 <지배받는 지배자>에 대한 조선일보 서평에 등장하는 '상식적'이란 결론이 책의 결론부분에 해당한다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대학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라는 염려가 생긴다. 현재 대학의 모습을 아무리 긍정해봐야 지식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백화점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서울 한복판에 있는 백화점에 사람이 몰리는 것처럼, 인서울 대학들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지방대학의 위기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그런데 승자없는 게임의 수렁일 수 있는 '연구경쟁'을 장미빛으로 그리고, 치유하기 쉽지 않은 중병에 빠진 오늘날 한국 대학에 대해서 미국 자본주의적 대학관념을 기본 프레임으로 설정한 채로 대학론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학의 몰락』 시리즈 <12> 1장 대학의 현실 [대학의 몰락] 중.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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