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깊은 속 뜻을 알아들어야 

휴머니즘 자체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대학의 사명은 무엇인가?


대학의 사명은 무엇인가? 과학기술문명이 일구어낸 오늘날 대학이 추구하는 본래적 자세는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 저자 서보명이 펴낸 책 <대학의 몰락>에서 고민하는 가장 큰 주제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대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저자는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학의 미래와 인간의 미래는 떼어낼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학의 미래와 인간의 미래는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단언하길, 대학의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사유에 대한 신뢰이며 사유의 필요와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54) 그리고 확장되어야 할 신뢰는 인간에 대한 신뢰이다. 오늘날 사회는 그러한 방식의 신뢰를 쉽게 허용치 않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에 대한 신뢰는 문제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인간의 미래는 체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과학기술과 의료기술의 발달 덕택에 더 편리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편리한 인간의 생활방식 때문에 한정된 지구 자원은 소멸되어 가고 있고, 지구환경은 파괴되어 가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욱 부추긴다. 인간이 겪는 억압과 고통, 그리고 거짓과 불의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발생하는 상황이라면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미래는 체제와 분리될 수 없다. 지구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체제 안에서 살고 있다. 군주시대와 귀족시대에는 소수의 특권층만이 받을 수 있던 교육을 이제는 모든 인간이 받아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인문학이 죽어가는 이유


그러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극심한 경제적 빈부격차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독재체제를 완성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라면 모든 개인이나 시민은 인문학적 소양이 어느정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주권행사를 위해서, 자신의 이익과 반대되는 일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게 바로 인문학적 품성이다. 민주시민을 양성한다는 것은 바로 민주적 사고방식을 지닌 인간을 양성한다는 말이고, 초, 중, 고, 대학의 전체 교육과정에서 그러한 인간 육성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 대학과 대학교육이 존재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없어지고 있으며, 인문학 교육도 줄어들고 있다. 인간이 없어진다는 것은 민주적 시민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학이 몰락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경쟁의 시대에 '경쟁'할 수 없는 인문학의 표류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할까? 인문학은 왜 이 시대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나? 2차 세계대전의 참극을 겪은 서구유럽에서 그 이후 보여 온 인문학적 전통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인문학적 발전은 동서냉전과 미국의 패권주의적 지구촌 환경에서 보편주의적인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밀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계 공용 학문인 이공계 지식이 전 세계적 네트워킹 속에서 통일되고 전체주의적인 학문적 추구와 발전이 가능했지만, 인문학은 지역마다 언어마다 환경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경쟁'이 중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밀렸다고 볼 수 있다. 

 

인문학은 잡종다양성이다


급속한 과학기술적 발전을 이루던 20세기 후반의 환경 속에서 인문학적 전통이 설자리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인문학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지만, 그 사상적 표현의 바탕이 말과 글이기 때문에 전 지구적으로 통일된 양식이나 해석이 통용될 수 있는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문학은 읽는 사람의 관점과 지식수준과 처한 환경에 따라서도 다르게 읽혀진다.

 

인간에 대한 정의도 제각각인 인문학


서양의 전통이 다르고 동양의 전통이 다르다. 서양에서도 영국이나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들이 각각 다르고, 동양에서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저마다 다른 인문학적 전통을 쌓아올리고 있다. 당대의 유행은 있겠지만 그 적용이 과학기술처럼 한방에 모든 사정을 논리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인문학적 전통에서 인간의 문제를 추구한다고 했을 때,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서양의 인문학적 전통에서도 대표적인 논쟁 한가지를 사례로 들 수 있다.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의 논쟁이 그것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했지만, 그의 무신론적 사상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이데거의 입장은 가뭄에 단비였고, 뜬금없는 우박 같기도 했다. 그래서 독일철학자 하이데거의 글 휴머니즘에 대한 편지”(Letter on ‘Humanism’)는 프랑스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편지는 프랑스 철학자 보프레(Jean Beaufret)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글이었는데, 보프레는 우리는 휴머니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를 물었던 것이다. 이 질문의 배경은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맞서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오히려 휴머니즘 자체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라 장애가 된다고 말하면서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휴머니즘 자체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휴머니즘이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히려 진리를 은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언급하는 휴머니즘이란 인류의 역사 이래 그 이름으로 등장한 온갖 종류의 것들이다. 로마시대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를 비롯하여 신과의 관계속에서 인간성을 추구하는 유신론적 휴머니즘, 그리고 중세의 껍질 밖으로 뛰쳐나온 근대적 휴머니즘 등이 모두 포함된다.

 

휴머니즘은 형이상학적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이 형이상학적이란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인간은 언어 속에서 거주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온갖 종류의 휴머니즘이 전제하는 형이상학적 요소를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적 요소를 자명하게 보고 의문을 품지 않은 게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따지는 데 이미 형이상학적 틀 안에서만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의 문제라고 본 것이다.

 

당대의 지성으로 등극한 하이데거


바로 이 대목에서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한다는 고민에 빠졌던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단비와 같은 뉴스가 되었다. 이른바 하이데거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도 당대의 지성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사실 하이데거는 친 나치주의자이며 반 유대주의자였다.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학생들에게 나치참여 연설을 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 하이데거의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프랑스에서 환영받은 일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대학의 몰락』 시리즈 <14> 1장 대학의 현실 [대학과 인간 그리고 인문학] 중.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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