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 나치, 반 유대주의자 하이데거의 철학 

야스퍼스가 경악했던 일(동료교수 고발)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욕망의 화신



대학의 사명에 왜 '하이데거'가 등장하는가? 


서보명은 대학에서 인문학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시급함을 누누히 강조한다. 대학이 몰락한 탓이 부실한 인문학 공부 때문이며 대학의 사명은 곧 '인간'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인문학적 노력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연구, 곧 휴머니즘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독일 대학의 개혁을 추구했다는 하이데거


그래서 책의 1장 대학의 현실 중 [대학과 인간 그리고 인문학] 편의 주인공은 하이데거(1889~1976)이고, 그의 [대학론]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3장 대학과 철학'의 예고편 성격을 가진 부분이다. 서보명이 말하길, 하이데거로부터 20세기 초반 독일 대학의 개혁이 추구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독일 대학이 이미 산업과 생산의 도구로 전락하였는데, 인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대학을 개혁하고 이를 통해 독일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하이데거의 노력에 조명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비인도적인 전력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구분해서 보려는 시도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 딜타이의 생의 철학 - 후설의 현상학 - 하이데거의 존재의 집


하이데거의 철학은 20세기 서양철학의 거인이다. 현상학, 해석학, 실존주의 철학으로 불리우고, 존재론, 형이상학, 언어학 등을 분야를 공부했다. 그의 대표작은 만 38세에 발표한 <존재와 시간>(1927, 독어 Sein und Zeit, 영어 Being and Time이고, 대표적인 말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이다.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에 대해 연구했다. 그래서 '존재'라는 표현 뒤에 당연하게 전제된 형이학상학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다. 그는 30살 연상인 철학자이며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1859~1939)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존재론)와 딜타이(1833~1911, 생의철학)에게도 영향을 받았는데, 이후 독자적인 '존재론적 철학 세계'를 구축했다. 


반 유대주의자이며 나치당원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이며 대학총장(1933 프라이부르크 대학)을 지낸 인물이긴 하지만, [대학의 몰락]의 저자 서보명이 하이데거를 통해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나치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절판된 [하이데거와 나치즘] (2001-2-15, 정가 18,000원). 저자 박찬국(서울대 철학과 교수)

중고인터넷 서점에서 좀 더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책] 하이더게와 나치즘 - 그의 감추어진 그림자

요한의독서노트 2015/06/16 19:56



하이데거와 나치즘


하이데거의 나치 전력은 [하이데거와 나치즘]이란 책에서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입당하고 만 44세의 나이이던 1933년 5월 1일 대학 총장이 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나치 혁명에 대한 지지와 참여를 호소한다. 1933년 11월 3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의 이름으로 <독일 학생들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로 나치 참여를 독려했던 것이다. 그의 친 나치 행각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중 가장 고약한 짓이 동료 교수를 반 나치인물로 고발한 것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게 나치운동은 독일민족이 도약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유럽문명을 구원하는 독일민족에 대한 환상


미국의 물질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를 벗어나 유럽 전체를 구원하는 유일한 민족으로 보았기때문에 1933년의 나치혁명은 기술문명의 위기에 직면한 유럽이 걸어야 할 미래라고 본 것이다. 1933년 반짝 활동했고, 그의 본격적인 철학적 사유는 1934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하이데거가 1945년까지 나치 당적을 유지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치당원 하이데거의 대학론이 유효한가


무엇보다도 그의 친나치 행태는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기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대학론]을 펼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를 살펴보는 것은 너무 많은 위험을 안을 수 있다고 보인다. 일제시대를 겪었던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제시대의 왜곡된 영향력 속에서 살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질곡 속에서 나치 행태를 보인 하이데거의 철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난 시점에 독일 대학생들에게 나치 참여를 호소한 현실적 사건을 주도한 이가 구축한 철학세계를 과연 올바르고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게다가 하이데거는 자신의 나치 참여문제를 죽는 날까지 침묵 내지 변명으로 일관해서 주위의 비판과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 중 이런 예를 들 수 있다. 한겨레 신문 2013년 5월 2일자 문화면 기사 <나치 편든 하이데거, 프라이부르크는 그를 지우려 했다>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김덕영 씨(사회학자, 독일 카셀대 교수)의 연재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의 <18> '하이데거 철학 낳은 프라이부르크' 내용 중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에 참여했으며 그해 11월3일에는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의 자격으로 ‘독일 학생들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통해 학생들에게 나치 참여를 독려했다. 아마 이러한 전력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인 하이데거에 대한 프라이부르크의 집단기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솔직히 나 같은 아마추어가 이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만약 하이데거의 과오가 “그의 사유의 결과였다면 그의 사유는 그러한 과오와 더불어 끝장났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1934년 이후에야 본래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오랜 기간에 걸쳐 대학에서 행하였던 모든 작업은 사유의 경험을 전한다는 유일한 과제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하이데거의 과오를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와 그의 지적 세계를 한 특정한 시점이나 행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와 함께 실존주의 철학의 주창자

친구따라 강남에 갔던 것도 아니고, 한 시대의 철학자가 44세의 나이에 나치에 전격 입당한 것은 본인의 의지였다는 것 외에는 어떤 설명도 구질구질하고 옹색한 일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는 만 44세에 입당한 나치에서 만 56세가 되는 1945년까지 탈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패망 후 유럽에서 전범과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청소작업에서 하이데거가 열외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철학적 업적때문이었다. 그는 서양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철학자'였고, 하이데거 스스로는 자신을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불리우길 원치 않았지만, 유럽의 지성사에서 그는 '케에르케고르, 야스퍼스와 함께 실존주의 철학의 주창자'라는 평도 얻고 있었던 것이다.

하이데거는 뜨거운 감자

이 글의 목적은 서보명이 지은 책 [대학의 몰락]에 등장하는 하이데거에 대한 거부감때문에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하이데거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원로로 자리잡고 있는 수없이 많은 친일파들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서보명은 [1장 대학의 현실]의 [대학과 인간 그리고 인문학] 마무리 표현(59쪽)으로 하이데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의 대학론의 문제는 제3장 '대학과 철학'에서 더 다루겠지만, 그가 추구했던 인간과 철학과 대학의 관계는 '인간'을 다시 보려는 인문학이 살펴보아야 할 부분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고민은 서유럽인들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2014년 12월 29일자 르몽드 디플로마티에 등장한 기사 <하이데거가 감옥에 갔다면>는 그 사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대학의 몰락』 시리즈 <15> 1장 대학의 현실 [대학과 인간 그리고 인문학] 중.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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