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교육 현장이 대학으로 옮겨간 사연
12세기가 변곡점이다
중세시대 교육은 교회가 맡아서 했다. 그런데 교회가 맡아서 교육을 했다는 것은 교회에 속한 이들의 교육을 주로 실시했다고 봐야 한다.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이라면 주로 성직자였기 때문이다. 미사를 드리며 통상전례문을 읽어야 하는 신부들이나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 성경 등을 필사하여 전파하던 수사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다.
종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종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그 믿음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지식의 체계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교육이었고, 따라서 교회는 배움의 산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이 완전히 변한다. 주로 15~16세기를 르네상스라고 일컫지만, ‘12세기 르네상스’라는 표현도 있는 것처럼 이 당시에 유럽문명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12세기는 ‘번역의 시대’라고도 불리운다.
번역이란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 12세기는 번역혁명
번역이란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행위이다. 12세기에 대규모 번역활동이 왕성하게 벌어진 까닭은 그리스도교와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라틴어 그리스도교 유럽 문명의 정체성이 또렷이 등장하던 때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틴어’ 공동체라는 점이다. 그리스어로 이루어진 고대 그리스의 유산과 아랍지역에 보관되었던 고대 지중해 문명권의 유산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교황권과 왕권의 대립
유럽 12세기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 있다. 당시 교황권과 왕권은 대립중이었고, 왕권 통치를 위해 필요한 것이 관료주의적 조직이었다. 즉 행정과 법률 지식으로 무장되었으며,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관료가 왕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에 권력 계층의 사람들은 사제들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중산층이나 농민계층은 교회나 수도원에서 배웠다. 그러나 수도원이나 교회의 교육체계는 수사를 배출하거나 사목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글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 기관들이 그 기능을 맡았던 것이다.
플라톤에 의지하던 중세 전반기
다양한 계층의 배움의 욕구가 증가하면서 사립학원 같은 조직도 생겨났다. 학원끼리의 경쟁도 벌어지면서 그 수준은 높아졌고, 그럴 즈음에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재회하게 된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학문의 새로운 분위기였다. 서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AD 3세기 이후 잊혀져갔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037년 이베리아 반도 그리스도교 문명은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남쪽 녹색은 이슬람 영토이다.
레콩키스타가 만들어낸 아리스토텔레스 혁명
아리스토텔레스는 레콩키스타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라비아를 경유해 12세기경 새롭게 등장했다. 레콩키스타는 약 7세기 반에 걸쳐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718년부터 1492년까지 우마이야왕조가 정복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12세기를 '아리스토텔레스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유럽의 과학적 사고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재발견으로부터 비롯된 지식의 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리처드 E. 루벤스타인) 이슬람의 지식인들은 고대 지중해 문명의 로마법과 철학과 수학과 천문학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이슬람화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다시 유럽으로 들어간 것이고, 그 중심지는 톨레도였다.
12세기 아리스토텔레스 혁명의 중심지 스페인 톨레도 (출처: 위키피디아) 톨레도는 앞서있던 이슬람의 지식과 그 원천이던 고대 희랍(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번역작업을 위해서 전 유럽의 학자들이 톨레도로 모여들었다.12세기의 톨레도는 유대교, 비잔틴의 그리스 학자, 아랍인 학자들도 크게 환영받는 문명의 용광로였다.
문명의 용광로, 톨레도
톨레도를 통해 유입된 이슬람화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원전이 라틴어로 번역하는 사업이 그 시대의 학문적 최대 과제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바로 8백여년간을 잊고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13세기 중반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대부분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런데 아랍 문명을 통해 다시 알게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바로 '논리학'이었다. 믿음에 대한 논리적 증명을 시도하려는 당시의 신학적이면서 지적인 분위기가 작용한 것이다.
대량의 지식이 들어온 후의 변화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세의 지식인은 대부분이 성직자였다. 가톨릭 교회가 지식의 생산과 유통 및 계승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으로부터 들어온 대량의 지식은 이러한 독점적 지위를 흔들고 있었다. 새로운 지식층의 등장이 신호탄을 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가톨릭 교회의 후원을 받는 파리 대학의 등장과 함께 왕국(신성로마제국)의 후원을 받는 볼로냐 대학 같은 대립적 구조를 낳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권위와 세속의 권력이 대립하며 후원하게 되는 과정에서 대학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합에서 시작해 대학으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된 까닭
처음에 대학은 학생이나 교수의 이익집단인 '조합'의 형태였다. 도시민들을 비롯한 다른 집단과의 마찰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방비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한 대학 중 가장 유명한 파리 대학은 파리의 교구학교로 출발했다가 유명해지면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합(유니베르시타스, Universitas)가 되었지만, 몇 백년동안 종교적 후원이 있었기에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대학'이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된 배경이 그렇다는 것이다. 볼로냐 대학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보증인이었다면, 파리대학은 주교와 교황의 후원에 의지했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니 대학인 볼로냐 대학은 1088년 설립되었다. 1988년에 개교 9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볼로냐 대학의 로고 출처: 위키피디아
학위 가운도 성직자 복에서 기원
현재 한국의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이 졸업식에서 착용하는 '졸업가운'의 모습도 성직자의 의복을 흉내낸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스스로 '성직자'에 준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대학은 교회나 국가로부터 자치권을 받았고, 그것은 대학 내부의 각종 사건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게 쉽지 않았던 현실적 이유가 크게 작동했던 것이다.
아무튼 유럽에서 대학의 롤모델이 되는 것은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이다. 이후 유럽 각지에서는 우후죽순처럼 대학들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프랑스의 파리대학에 이어서 영국과 북유럽이 그 뒤를 이었다.
『대학의 몰락』 시리즈 <19> 2장 대학의 역사에서 [대학의 출발] 중.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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