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국가의 등장과 라틴어의 쇠퇴
중세 대학은 신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기초학문이란 표현은 곧 신학을 뜻하는 것이었고, 신학 이외의 과목은 모두 보조적이었다. 철학은 신학을 돕는 방법론이었고, 법학은 교회법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그리고 모든 강의는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라틴어는 1,500년 이상 학문의 성스러운 언어였다.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인쇄술의 혁명과 종교개혁의 혼란이 유럽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1637년 데카르트(1596~1650)가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을 프랑스어로 썼다는 것은 대단한 시도였다. <방법서설>은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 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의한 에세이로서의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이란 제목의 줄임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라틴어로 쓰지 않은 최초의 근대철학책이다. 출판당시 데카르트는 모국어인 프랑스어가 라틴어보다 더 순수하고 자연적이라는 주장을 갖고 책을 출판한 것이었는데, 4년후 급 변심을 한다. 1641년 <제1철학에 대한 성찰>을 라틴어로 출판하면서, 제대로 쓰려면 라틴어를 활용해야 한다는 변명을 했다는 것이다.
<대학의 몰락>의 저자, 서보명은 중세대학의 가장 큰 유산이 ‘학문의 자유’나 ‘대학의 자율’이란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세대학의 가장 큰 유산은 ‘합리적 토론’, ‘논리적 사고’ 등의 학문적 자세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합리적 토론과 논리적 사고'가 교리와 교권의 지배를 받던 중세의 가톨릭적 분위기에서도 혁명적 사고의 싹을 틔우게 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데카르트의 시도는 라틴어와 모국어의 사상적 긴장관계 속에서 성스럽게 여겨졌던 라틴어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단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유럽의 대학은 16세기 이후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많은 대학들이 신구 교회로 양분되었으며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대립과 갈등이 이미 대학 안에 침투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대학은 더 나아가 루터파, 개혁파, 갈뱅파로 분열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서 ‘도시의 자유’를 기본으로 ‘지성의 자유’를 탄생시킨 대학의 등장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한차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루터의 종교개혁(1517)이나 인쇄술의 혁명 등으로 시작된 새로운 모습이었다. 특히 인쇄혁명은 종교개혁이나 근대과학이 탄생하는 필수적 조건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고 존엄의 자리를 차지했던 라틴어는 인쇄술의 혁명적 발달 앞에서 종이호랑이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5세기 중엽 독일에서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지식의 대량복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제 지식은, 특히 성경은 더 이상 성직자와 지배층의 독점물이 아닌 시대로 변화된 것이다.
출판인쇄술의 대중적 보급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고, 이와 함께 등장한 국민국가에는 ‘국민언어'가 필요했다. 이제 서서히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와 같은 새로운 지식의 세계와 이를 뒷받침하는 저자들의 탄생을 예고하게 된 것이다.
『대학의 몰락』 시리즈 <21> 2장 대학의 역사에서 [대학의 출발] 끝.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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