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변화의 사상적 기원, 루터의 저항
1492년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루터는 근대적 변화의 사상적 근거를 만든 사람이다. 루터는 유럽을 둘로 나누는 교회의 분열과 새로운 정치의 시대를 꿈꾸지 않았다. 교회와 세속의 정치가 하나였던 시대에 교회의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 중세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개혁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95개조 반박문은 중세의 학문적 방법론에 불과했지만 ...
종교개혁은 대학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었다. 원래 루터는 중세대학의 교수였다. 그리고 그의 비판적 사상이 이렇게 유럽 전역을 뒤흔들어놓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루터가 한 것은 가톨릭 교회의, 혹은 교황의 더러운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것이었다. 그의 비판적 선언이 바로 95개조의 반박문이다. 그런데 그 내용과 형식은 중세대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당시의 전형적인 학문적 방법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95개조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던 것은 그 내용이 시대적 공감을 얻었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과도한 교회의 탄압도 빌미를 제공했다. 교회가 시대적 변화에 어두웠던 탓이 가장 컸을 것이다. 루터는 내쳐진 것이지 스스로 교회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루터의 반박문은 대중적 언어가 아니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교회의 문에 못을 박아 붙여놓은 95개의 논제로 된 “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반박문”은 대중적 언어로 쓴 글이 아니었다. 1517년에 붙여진 그 반박문은 대학의 언어였기에 라틴어였다. 여기서 우리는 '반박문'(Disputation)에 대한 오해를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당시의 평이한 학문적 방식이었다. 중세 대학에서 유통되던 공개적인 논증의 절차였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론적으로 자기 주장을 밝히는 것이었기에, 논제들(Theses)을 제시하고 학문적 토론을 요구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었다.
오늘날의 대학 논문심사과정이 그 흔적이다. 흔히 박사학위를 눈앞에 둔 학생들이 마지막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디펜스'한다고 표현하는 그런 방식과 흡사하다. 이런 반박문을 통해서 루터는 95개의 논제를 제시했다. 그 내용은 면죄부의 효력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학의 학문공동체 안에서 비판적 토론을 하자는 구체적 제안이었다. 일반인들은 무관한 일이었다. 교회의 문에 붙인 것은 흔한 방식이었다. 그 시절에는 흔히 교회 문에다 공고문이나 반박문을 붙여놓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처럼 아주 중세적인 대학의 학문적 전통 행위가 중세대학의 종말을 예고했던 것이다.
번역의 시대였고 대량인쇄의 시대였다
무엇보다도 '인쇄술'은 혁명적 변화의 인프라였다. 루터의 글이 빠른 속도로 독일 전역에 퍼져 나가는 데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있기에 가능했다. 값싸고 쉽게 대량의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글을 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라틴어만이 아니라 각 나라 언어로도 책들이 번역 출판되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바로 대중적 요구였다. 더이상 라틴어만이 학문의 전용언어가 아닌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루터의 95개의 논제는 라틴어판과 독일어 번역판으로 계속 인쇄되었고,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 퍼져 개혁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그 후에 루터는 독일어로 대중적인 글을 쓰면서 개혁의 논리를 보편화시켜 나갔다.
인쇄술은 평신도의 종교교육을 강화시켰다
인쇄술의 발전이 바꾼 또 한가지는 일반인의 종교교육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학문적 논쟁으로 개혁을 주장하던 루터도 일반인들의 종교교육을 강조했다. 1517년 이후의 일이다. 그는 모든 어린아이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성경을 스스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주들에게는 학교 세우기를 권장했다. 라틴어로만 쓰여 있던 교회음악을 독일어로 번역하고,독일어 찬송가로 바꾸면서 찬양의 대중화를 도모했다. 교인들의 신앙교육을 부흥시키기 위해 교리문답을 직접 쓰기도 했다.
독일교회의 언어를 독일어로 바꾼 공로자, 루터
이런 개혁적 행위들은 독일 교회의 언어가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변화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낸 것은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이었다. 성서으 독일어 번역은 개신교적 신앙의 기초를 닦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 시대의 최대 문화사업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근대적 학문이라는 새 모델이 탄생했다. 교회의 언어가 바뀌자, 신앙적 요소에 '민족 개념'이 새롭게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민족 종교'는 보편종교가 될 수는 없었기때문에 위험한 요소들도 있는 것이었지만 독일은 그 땅에 사는 '독일민족'과 그 땅의 언어인 '독일어'와 그 땅의 신앙인 루터교가 하나로 뭉쳐졌다. 한편으로 루터의 개혁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신조하에 계속 발전되어 17세기와 18세기의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천년 중세유럽의 종지부를 찍은 루터
루터의 개혁은 대학의 역사에도 획기적 변화를 이끌었다. 유럽의 중세 천년이 종말을 고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대학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했다. 사실 루터는 중세대학의 교수였지만, 핍박 속에서 중세 대학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독일어와 역사학을 강조했다. 그러한 주장은 라틴어와 스콜라 신학과 철학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중세 대학의 전통과 맞서는 행위였다. 엘리트적 교권주의를 비판하면서 일반 서민의 교육을 강조했는데 그 주장은 이렇게 표현된다.
"쓸모없는 철학과 쓰레기같은 스콜라 신학"
중세적 관념에 대한 그의 비판은 한결 같았다. 이 모든 입장이 1517년 이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 때 철학과 스콜라 신학을 강의하는 중세대학의 교수였던 그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중세 대학의 사변적 학문은 성서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때문에 그런 사상이 뿌리 내린 대학은 몰락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는 일반 교인들이 글을 배우고, 성서를 스스로 읽고 하느님 앞에서 홀로 바로 서게 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동시에 루터는 그들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올바로 하려면 역사, 법, 정치, 산수 등 실용적인 학문도 배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계속)
『대학의 몰락』 시리즈 <22>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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