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왕자에서 거지로 변한 라틴어

한때 종교와 학문의 언어였던 라틴어도 종말을 맞이하게 돼


라틴어는 신비한 언어였다. 성직자 전용 언어였고, 동시에 학문의 언어였다. 그리고 그 라틴어를 알아듣는 소수 지식인들이 특권을 누리던 게 중세시대였다.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교회 문에 못 박은 95개 논제 [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반박문]도 대중적 언어가 아니었다. 1517년에 붙여진 그 반박문은 대학의 언어였기에 라틴어였다. 그렇게 라틴어는 1,500년 이상 신비하고도 성스러운 언어였다. 백성 따위가 알아들을 수 있는 하늘나라의 신비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중세 학문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그 라틴어를 통해서 학문의 이상과 가치를 담았던 것이다. 그런데 16세기에 이르러 그 조건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각 나라의 말로 성경들이 번역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16세기는 성경의 언어 자리를 라틴어가 독점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라틴어는 성경의 언어 권좌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나서 17세기가 대학의 강의도 지역 국가의 언어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학문의 언어의 권좌에서도 라틴어는 쫓겨나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인쇄술의 혁명과 종교개혁의 혼란이 유럽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절이었다. 1637년 데카르트는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을 프랑스어로 썼다모국어인 프랑스어가 라틴어보다 더 순수하고 자연적이라는 주장을 갖고 책을 출판한 것이었다. 그래서 라틴어로 쓰지 않은 최초의 근대철학책이란 위상을 갖고 있지만, 주위의 눈치를 본 탓인지 4년후 급 변심을 한다. 1641 <1철학에 대한 성찰>을 라틴어로 출판하면서, 제대로 쓰려면 라틴어를 활용해야 한다는 변명을 했다는 것이다.


1517년 종교 개혁이 시작되면서 이후 100년 여가 지나서 17세기가 되면 개신교의 이념이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자리를 잡는다. 특히 독일에서 그 변화가 주목된다. 근대 대학의 전통이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개신교의 전통은 양심에 의거한 신앙의 자유였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양심에 의거한 학문의 자유라는 생각이 기풍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근간으로 하던 스콜라철학을 반대하는 반 스콜라적 학문의 분위기가 자리를 잡아갔다. 


그 중에서 할레 대학은 가장 대표적인 대학이다. 1694년에 세워진 할레 대학은 독일 작센안할트 주의 할레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가 되어 할레는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었고, 그 영향으로 대학을 세운 것이다. 한편 할레는 1685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ändel, 1685∼1759)이 태어났기 때문에 '헨델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영국 작곡가이자 독일 할레 출신 헨델은 할레 대학에 다니기까지 했다. 아무튼 할레대학교는 1817년 비텐베르크에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1502)과 1817년 통합하면서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가 되었다. 이름에 '마르틴 루터'가 붙은 것은 1933년 11월 10일의 일(마르틴 루터 탄생 450주년 기념)이다. 


한편 1694년에 생긴 할레대학은 유럽 최초의 근대적인 대학이었다. 당시 종파와 주의(主義)에 구애되지 않고 사상과 교수의 자유 원리에 입각하여 근대적 철학과 과학을 중시하였는데, 이러한 학풍은 나중에 베를린대학을 설립하는 모델이 되었다. 또한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의 요람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에 뼈저린 반성의 기회를 주었고, 오히려 선교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100여년 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때에 독일을 중심으로 최초의 경건주의자 스페너(P. J. Spenner, 1635-1705)가 등장한다. 


스패너는 독일 사회에 개신교 선교의 불길을 일으켰다. 기도와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경건주의적 신학은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회심의 체험을 불러일으켰다. 경건주의적 주장에는 열정어린 선교와 진정한 회심을 개인적으로 경건한 생활 속에 녹아들게 하자는 입장을 보였고,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신앙 생활을 하자는 주장으로 펼쳤기에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건주의에 대한 반대세력의 박해도 있었는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스페너를 중심으로 1694년 할레에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브란덴베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후원으로 스페너는 대학을 세우고 10년간 헌신하다가 프랑케(A. Francke, 1663-1727)를 후계자로 세웠다. 


또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며, 개신교 세계에서 '근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도 할레 대학에 입학하여 2년간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고,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 귀츨라프도 할레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재미있는 것은 할레대학에서 영국 작곡가이자 독일 할레 출생인 헨델(George Frideric Händel, 1685∼1759)도 1702년 아버지 희망에 따라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며 칼빈파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그 유명한 메시아를 작곡하였다.


특히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따르면 (87쪽) 대학이 과학적 탐구와 연구로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란 시각은 주로 대학 밖에서 이뤄진 17세기 자연과학의 혁명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자연과학 중 특히 수학이 모든 학문의 방법적 모델이 되었고, 신의 존재까지도 수학적 방법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이 나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18세기에는 대학에 [리서치]란 개념이 등장하고, 경전 강독을 대신해서 체계적인 강의와 수업 방식이 등장했다고 한다. 


중세 대학이 신의 자유를 추구했다면 근대의 대학은 인간의 자유를 추구했다. 인간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였고 양심의 해방이었다. 그것이 더 나아가 생각의 자유로 이어졌다. 



『대학의 몰락』 시리즈 <24>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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