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자유야말로 대학 자율성의 근본이다
'인쇄술'은 혁명적 변화의 인프라였다. 루터의 글이 빠른 속도로 독일 전역에 퍼져 나간 것은 인쇄술 덕분이었다. 값싸고 쉽게 대량의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글을 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인쇄술은 번역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루터의 95개의 논제는 라틴어판과 독일어 번역판으로 계속 인쇄되었고,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 퍼져 개혁운동의 발판이 된 것이다. 그 후에 루터는 독일어로 대중적인 글을 쓰면서 개혁의 논리를 보편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16세기가 되면 개방적으로 지식이 계승되는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바로 출판시장이 생긴 것이다. 16세기 이후 출판사를 통한 지식 네트워크가 대학을 능가하는 지식창조의 거점이 된 것이다.
17세기에 이르러 대학의 교수들에게도 글쓰기가 새롭게 요구되었다. 그 전에는 강의만 하면 되었지만, 글로 지식을 전하는 역할이 부가된 것이다. 게다가 대학의 중심과제가 '신학'에서 '철학'으로 옮겨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특히 18세기에 칸트가 등장하면서 철학은 신학을 제치고 대학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칸트는 1724년에 태어나서 1804년에 죽었다. 80세를 살았던 인물이었고, 서양의 철학은 칸트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된다. 칸트가 죽었던 시기는 근대철학이 끝나고 현대철학의 여명이 밝아오던 때였다.
칸트는 대학 내에서 철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이 중심이 되면 안된다는 뜻이었다. 18세기에 자연과학은 자연철학이었다. 자연과학자는 곧 철학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구분하여 이해한다. 인문학을 때로는 인문과학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생각은 19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그 전에는 신학, 의학, 법학의 세가지 분야가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철학이었다. 철학의 품 안에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학에는 요즘 통상 표현으로 빌려 말하면 3개의 단과대학이 있었다. 신학대학, 법과대학, 의과대학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도 '과'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러한 '과'(科)라는 표현도 역시 19세기 흐름 속에서 생성된 용어이다. 따라서 '신과', '법과', '의과'가 아니라 신학대학, 법학대학, 의학대학이 존재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Faculty'(학부) 개념으로 구분되어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라는 세개의 학부(Facluty)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러한 3대 학부에서 공부하기 위한 기초과정으로 기초학부인 철학부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신학, 법학, 의학은 모두 전문인 양성소였다. 오늘날의 신학대, 로스쿨, 의전 등과 같은 것이다. 실제적인 응용이 가능하거나 직업인으로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영혼을 구하고(신학), 사회를 다스리고(법학), 몸을 돌보는(의학) 학문으로 세상이 구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기초학부인 철학부에 속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학분야도 '자연과학'이란 표현보다는 '자연철학'이라는 표현으로 철학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왜 상황이 변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의 번역은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곧 성경의 번역이었고, 그 배경은 출판 인쇄술의 대중화였다. 즉 1517년 중교개혁이 시작되면서 100여년이 지난 17세기가 되면 개신교의 이념이 유럽의 많은 지역에 자리잡는다. 그인쇄술은 평신도의 종교교육을 강화시켰으며, 교육적 수요는 더 많은 교사들을 필요로 했다. 즉 18세기에 이르러 교사라는 전문 직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교사를 교육시키기 위한 역할은 대학의 철학부가 맡았다. 즉 철학부도 ‘기초학부’의 외피를 벗고 ‘교사’라는 전문직업인을 양성한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칸트의 제자들 중에서도 교사들이나 교사 지망생들이 많았고, 교육의 세속화를 통해서 ‘교육학’이란 개념이 생겼다. 이른바 18세기는 ‘교육론’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철학의 시대였고 철학부의 시대가 되었다. 철학부의 달라진 위상은 철학이 대학의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중세대학의 사상적 근거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다면, 근대 대학의 발전 과정의 사상적 근거는 칸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칸트는 말년인 1798년에 쓴 학부들의 논쟁(Conflict of the Faculties)이란 ‘대학론’에 관한 책애서 대학 내에서의 철학의 위치를 강조했다. 철학의 정신과 가치를 강조하면서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개혁이라는 제도적 변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앞서 언급한 3대 상급학부가 외부의 요청에 따른 타율적 지성이라면, 하급학부로 일컬어졌던 철학부는 외부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지성을 가진 곳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이 이성의 자유야말로 대학 자율성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대학의 몰락』 시리즈 <25> 서보명의 책 <대학의 몰락>에 대한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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