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건 비현실적일까?

- 윤 일병 사망사건에 부쳐 -


지난 4월에 육군 28사단의 윤 모 일병이 동료 선임 병사들의 구타행위로 죽음에 이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꽃다운 22살의 청년 윤 일병은 또래의 동료 병사들에게 무참하게 폭행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이 은폐축소되는가 싶다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지난 9월 2일, 3군사령부 검찰부는 가해병사 4명(이모병장, 하모병장, 이모상병, 지모상병)에 대해서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보고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으로 공소장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배 사병들인 가해자들이 피해자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가해자들은 대체로 조금씩 일찍 들어왔다는 것 뿐입니다. 선임병사들이라고 하지만 윤군 육군 사병의 의무 복무기간은 고작 21개월에 불과합니다. 

 

2년도채 되지 않는 기간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중에 입대일을 기준으로 우열을 가려놓고, 그 작은 차이가 엄청난 차별과 폭력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어이없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런 사건이 2014년에 벌어졌다는 사실에 경악스럽고, 그것이 또한 세월호 사건으로 온 국민이 침통의 바다에 함께 빠져있을 때, 우리 나라의 다른 한켠에서는 한 사병이 지옥에서나 겪을 법한 일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 사회의  비극적인 현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20대 초반의 병사들은 1990년대 생입니다. 이모 병장이 25세라고 하니 80년대 후반 생일 것 같고, 나머지는 모두 1990년대에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1990년대는 어떤 시대였습니까? 최근 우리 사회는 1990년대를 호출하는 '응답하라, 1990년대'라는 식의 복고열풍에 빠져있기도 합니다. 1970~80년대가 시위와 투쟁으로 얼룩진 민주화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고도성장의 혜택 속에서 대중문화가 꽃피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젊은 가해자와 피해자 병사들이 태어났던 시절은 1997년 IMF 이전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10년인 2000년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우리나라는 1997년 IMF라는 경제대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중산층은 몰락했고, 빈익빈 부익부는 더욱 심화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가 맞닥뜨린 것은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참사였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의 질서는 심각하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2004년 12월 26일 동남아 해안을 덮쳤던 최악의 쓰나미. 이 사건으로 3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3년 1월 17일 개봉한 영화 '더 임파서블'은 이 재난 속에 살아남은 가족의 실화를 전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테러와 전쟁 그리고 자연재해가 빈번해지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호황을 누리던 신자유주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맞이합니다. 2008년의 일이었고, 그것은 세계적 금융위기를 불러왔습니다.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오히려 전 세계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개별 국가들은 세계화의 회오리에 빨려들어가 탈출할 수 없는 포로가 되어버렸을 때, 그 국가의 개인들은 극심한 경쟁의 포로가 되어 고군분투하며 각개전투를 치루게 되었던 것이죠. 


취업하기 어려운 현실과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요즘 청년들에게 이웃과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연대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현실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세상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정글법칙이 최선의 선택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윤일병의 죽음에는 이 시대를 비관하게 만드는 뼈아픈 전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곳 저곳의 군 병영에서 일어나는 약자의 고통과 관련하여 9월 7일자로 지면발행되는 평화신문에는 '군종장교의 역할'이라는 칼럼이 있습니다. 그 기사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것은 가톨릭 성지 하부내포의 주임 윤종관 신부님이 2013녀녀 3월 15일에 쓰신 글입니다. 윤 신부님은 월남전에 사병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는데, 또 군에 입대하신 분입니다. 모든 군필자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며 제대 후 한동안은 꿈에도 나타나는 입대영장에 대한 우스개 소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윤 신부님은 사병으로, 다시 군종신부로 8년여간을 군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윤 신부님의 글은 2013년 3월에 있었던  군종신부에 대한 면접 탈락이 이슈가 되던 시절의 의견입니다. 그러나 그 글 내용 중에는 윤 일병 사망사건과 관련해서도 읽어볼만한 가치가 존재하기에 소개합니다. 특히 다음의 대목이 그렇습니다.

군대라는 모순적 집단에 왜 교회는 사목자를 집어넣는 것입니까? 거기서 그래도 우리 인간들이 절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절망적 모순 속에서 그나마 사람이 마지막에 피신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군종신부는 거기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 내의 교회는 전쟁터 속의 평회지대인 것입니다. 그걸 이해하려면 우리가 비신자들인 군대사람들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신자들에게 무조건 교회의 사고방식으로만 말하면 통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윤종관 신부님이 해병 군종으로 근무한 경험에 대해 2013년 3월 15일 쓰신 글입니다. [원문보기]


군종신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군종신부 선발시험에 안보관을 질문하여 탈락시킨 국방부 처사를 보도한 기사를 읽고, 저는 착잡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과거 젊은 시절에 군종신부로 5년간 지냈습니다. 최전방 부대에서 군인들과 고락을 함께 하기도 했고, 후방부대에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사목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은 유신시절이었습니다. 시국적으로 극악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일요일도 다른 요일과 바꾸어서 지내라고까지 하던 참으로 비인도적 공포분위기로 군종 사목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일요일을 다른 요일과 바꿔 지내는 것을 일컬어 ‘전투요일제’라 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주일(主日)이라 일컫는 ‘일요일’은 매우 취약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6․25가 발발한 것이 일요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여 군대에서는 일요일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요일을 모두 휴일로 삼는 남한을 북한군이 호기로 삼아 도발하려 한다면서, 일요일을 ‘주일(主日)’이라 해서 딴 짓을 하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행위를 하려면 다른 요일에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편으로 A부대는 월요일에 종교행위(미사 ․ 예배)를 허용하고, B부대는 화요일에 종교행위를 허용하고, C부대는 수요일에, D부대는 목요일에 등등… 그렇게 해서 군대에서의 종교행위를 각 부대별 7일간의 요일 중에 나누어 해당 요일을 정해놓은 것이 그 시절의 ‘전투요일제’였습니다. 부대별로 ‘Sunday’가 달랐던 것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회상하는 저의 추억은 참으로 씁쓸하기도 하고 한편, 그 바람에 제가 더욱 열심히 뛰어다니게도 된 일종의 위기활용(?)을 할 줄 알던 보람된 시절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진짜 일요일인 ‘주일(主日)’에 5∼6개 부대를 바쁘게 순회하면서 장병들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날 하루에 되도록 많은 부대 즉 ‘전투요일제’의 일요일이 진짜 Sunday에 해당되는 부대들을 찾아서 ‘진짜주일(主日)’의 미사를 봉헌하려고 그리했습니다. 그리고는 월요일이나 화요일 등의 다른 부대들 전투요일제 해당 일요일을 찾아 그날의 그 부대 신자 장병들에게 ‘가짜주일(主日)’의 시간을 갖게 해서 조금이나마 그 부대 신자 장병들의 ‘평화의 시간’을 갖게 하는 꾀를 쓰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주일(主日)’의 미사를 봉헌하는 진짜Sunday에는 저의 몸이 파김치 되는 날이었지요. 그리고 ‘가짜주일(主日)’에 해당 된 부대 장병들에게 가서는 그들에게 제가 핑계 낌에 노는 시간(‘평화의 시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지요.
 
그렇게 지내는 제가 어쩌다가 모처럼 시간을 내어 교구(후방)의 동료 사제들(민간 본당 사제들)을 만나러 가면 놀림을 당하곤 했습니다. 군복 입고 나타나는 저에게 동료 사제들이 “야, 박정희 녹 먹고 사는 사람 왔다.” 하며 비꼬곤 했습니다. 그 시절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님들 중에 몇 분이 감옥에 가 있던 때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옭아 넣던 시절입니다. 

그러므로 저 같은 군복 입은 사람들은 ‘박정희의 부하’라는 놀림 깜이 되곤 했습니다. 왜냐면 군인들이야말로 가장 충성스런 독재정부편이라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그렇게 놀려대는 신부님들 가운데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주교님께서 군종신부로 가라고 하셨을 때 건강상의 이유나 다른 묘한 이유를 들어 군종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결정을 유도해서 군종신부 선발을 모면한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박정희 부하’라고 놀려대는 신부님들에게 제가 화를 내면서 “아, 비겁하게 꽁무니 빼던 사람들이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하고 고함지르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야, 자네 해병대 옷 입고 큰소리치는걸 보니 그 동네(군대를 일컬음) 세력 자랑 하는 거냐?” 하고 저를 더욱 약 올리는 거였습니다. 그 시절 제가 해병대 군종신부였거든요.
 
그런 놀림을 당할 때 저는 참으로 억울하고 슬펐습니다. “여보슈들! 내가 뭐 박정희가 불러서 군대 간줄 아슈? 주교님들이 ‘군종신부단’이라는 걸 만들어서 나를 거기 넣었지! ‘군종신부단’을 뭐 박정희가 만들었나? 교회가 군대 안에 있는 사람들 돌보라고 신부들 거기다 보낸 것인데, 그걸 이렇게 놀림 깜으로 삼는 게 사제들로서 할 말이냐?” 이렇게 고함치다가 벌떡 일어나 부대로 돌아와 혼자서 억울하고 외롭고 슬퍼서 울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장병들이 저를 반겨줄 때에는 그들의 얼굴이 고마운 얼굴로 보여서 눈물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거를 회상하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사제생활의 여정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시절로 가슴에 남습니다. 그 시절 해병대 전방에서 사귀었던 사람들을 수십 년 지난 오늘에 문득 만나면 그들도 이제 노년의 사람들이 되어 그 험악했던 기억을 아름다운 회상으로 저와 나눕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도 옛 군종신부 시절에 제가 숙지하고 지냈던 ‘제네바 협정’의 주요 내용을 저의 사제생활 중 일반(민간) 사목에 있어서도 동일한 정신으로 간직하여 저의 신원에 대한 반성 자료로 삼습니다. 그래서 이번 국방부의 군종신부 선발 면접시험 조치에 대한 보도를 읽으면서 씁쓸한 추억과 함께 혹 교회 당국(주교님들)과 국방부가 그 ‘제네바 협정’의 정신을 참고하여 군종 제도에 관하여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바라면서, 그 국방부 조치에 대한 보도기사에 제가 달았던 댓글을 첨부하여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래, 저(윤종관)의 댓글입니다.)
 
저는 유신시절에 군종신부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험악했던 시절이지요. 제가 일하던 부대 내에서 지휘관(장군)과 많은 고급 장교들이 저와 함께 장교식당에서 식사 중에 혹은 참모회의 중에 불쑥 당시의 시국상황에 대해서 말을 꺼내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을 빨갱이들이라 하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반국가 괴수라고까지 말을 했습니다. 저 들으라고 말입니다. 명동성당을 빨갱이 소굴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저의 반격 또한 만만찮았지요. “서울 명동으로 쳐들어가서 박살내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서울 명동성당 그 빨갱이 소굴을 박살낸 다음에 그 기세로 휴전선을 돌파해서 평양까지 쳐들어가자고 제가 그랬지요. 그러면서 덧붙이는 저의 말이 “왜 서울 명동을 향하여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 군인으로서 늘 휴전선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할 군인들이 왜 후방 명동을 향하여 그렇게 예의 주시하는가? 그게 바로 정치군인들이다. 당신들 같은 정치군인들 때문에 휴전선이 불안하다.” 이렇게 제가 윽박지르곤 했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사순절 특별강론을 함께 가서 듣자고 군인가족들을 데리고 명동성당에 가곤 했습니다. 그것이 보안부대에 탐지되어서 보안부대장이 저보고 오라 가라 했습니다. 제가 보안부대장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슈! 보안부대는 명동성당 감시하는 부대입니까? 간첩 잡는 보안부대는 명동에 가서 내가 간첩 접선하는 것 살피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군인가족을 반국가 사상 물들게 하기 때문에 데리고 가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천주교를 반국가 집단이라는 식의 논리였지요. 이런 식으로 군종신부가 군인들과 그 가족들 사목하는 걸 감시했습니다. 저보고 신자명단 제출하라고까지 윽박질러대곤 했지요. 저는 대답하기를 “신자명단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당신네들에게 말할 수 없소. 우리 주교님이 신자명단 제출하라면 주교님께는 제출할 겁니다. 그러니 주교님(그 당시 군종신부단 총재주교님)에게 가서 신자명단 보자고 하시오.” 하였지요.
 
그런 식으로 저의 군종신부 시절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제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당에 있는 다른 사제들이 저를 만나면 “박정희에게서 녹을 먹는 사람 왔다”면서 놀려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 동료사제들에게 뭐라 대답한지 아세요? “야, 자네들은 주교님이 군종 가라면 핑계대고 꽁무니만 빼더니 나보고 그러기야? 비겁한 사람들 같으니라구! 군대가 사목 현장이라는 걸 모르나?”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박정희가 나를 군대로 불러다가 월급 주며 먹여 살리는 줄 아느냐? 주교님이 나를 군대 보냈지! 왜냐? 거기 교회가 돌볼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렇게 입씨름을 한곤 하던 시절이 저의 군종신부시절이었습니다. 극악한 유신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저의 군종신부시절을 회상하여 지난 세월 그런 험악하기도 했었구나 하고 씁쓸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번 보도에 의한 군종신부 면접시험 탈락 사연을 듣고, 제가 가지고 있는 군종신부의 신원적 자아의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참고삼아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댓글을 이해하려면 우선, 군종제도가 어떤 목적으로 생겼는지 염두에 두고 읽으셔야 합니다. 군대란 근본적으로 전쟁을 위해서 만들어진 집단입니다. 그래서 심하게 표현하자면, 군대는 사람 죽여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입니다. 더욱 심하게 말하자면, 사람 죽이는 전문 집단이지요. 그런 집단 속에 속하는 일원으로 사제가 들어가 산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 상황입니다.
 
군대라는 모순적 집단에 왜 교회는 사목자를 집어넣는 것입니까? 거기서 그래도 우리 인간들이 절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절망적 모순 속에서 그나마 사람이 마지막에 피신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군종신부는 거기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 내의 교회는 전쟁터 속의 평회지대인 것입니다. 그걸 이해하려면 우리가 비신자들인 군대사람들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신자들에게 무조건 교회의 사고방식으로만 말하면 통하지 않습니다.
 
교회만이 말하는 논법이 아니고, 범인류애적인 논법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 범인류애적인 것이 곧 복음의 핵심이겠습니다만, 그걸 ‘복음(예수님 말씀)’ 운운하며 말하면 비신자들인 전쟁전문가들(군인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쟁참화를 체험한 인류가 반성하여 그 야만적 전쟁터에서 그래도 마지막으로 인간이 인간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정신을 갖게 된 것이 적십자정신의 태동이었다고 저는 말해주곤 했습니다.
 
인간들이 전쟁이라는 범죄행위로써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그 전쟁터에 그래도 사람 살리는 책무로 투신하는 군의관과 군종신부라는 존재가 생기게 되었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모순적 상황에 그래도 마지막 한 가닥 사람이 사람다움을 찾을 수 있도록 군종제도라는 것이 선택 된 것이지요. 그런 역사적 상황은 이른바 ‘제네바 협정’이라는 합의를 도출하게 된 것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여 적십자 운동이 제창되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제네바 협정에서 4가지 주요사항의 합의도출을 한 것이 인류의 마지막 양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지역의 군대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제1협정), 해상부대의 부상자 및 병자와 난파선 승무원의 상태 개선(제2협정), 포로 대우(제3협정), 민간인 보호(제4협정) 등, 크게 4개 분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제네바 협정의 주요 4가지 사항이 위협받을 때만 군종장교가 총을 들 수 있습니다. 부상자나 민간인이나 혹은 전쟁을 포기한 포로가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른 긴급 상황이라면 군종장교가 그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총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무기(총)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마지막 상황의 선택인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마지막 상황에 처한 인류적 양심의 상황 외에는 전쟁행위를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인간 생명을 위해서 분연히 일어서야 하는 게 군종장교의 책무입니다. 그런 책무를 수행해야 할 사람에게 전쟁목적적 사안을 들어 하느님 뜻 아니냐고 질문한 면접은 코미디 수준이지요. 군종장교는 비록 적군일지라도 보호요청을 받으면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왜냐? 적군도 인간이니까!
 
인간 생명 하나는 전쟁목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극적 상황에서 군종장교는 딜레마의 첨예한 대척점에 이른다면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할 사람입니다.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이 전쟁이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 생명을 보호할 책무는 국가든 개인이든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군종장교는 그 모순상황의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피신할 장소를 마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피신할 수 있는 곳, 그곳이 이른바 전쟁터의 진중교회(부대성당)입니다. 목숨 살리러 마지막에 의지할 수 있는 구호처이지요. 그곳은 적군도 들어와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남은 인간 양심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보호를 위해서 군종장교는 그 모순적 전쟁터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전쟁목적이 아니라 인간보호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러한 군종장교의 책무를 수행할 사람에게 안보관을 빙자한 면접 질문을 해서 검증하라고 하는 것은 군종장교를 선발하겠다는 게 아니고, 전투장교를 선발하겠다는 취지이겠지요. 그렇다면 아예 대한민국 국군은 군종 제도 자체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북한 인민군처럼 무조건 사람 죽여 이기고 보자는 정신으로 군종 장교도 총검 휘둘러 죽이는 일만 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터라 할지라도 마지막 남은 인간존중, 가장 귀중한 것이 인간 생명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그 모순적 전쟁터에서 부르짖어야 할 사람이 군종장교입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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