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종 박사의 "협동조합을 소개합니다." ①


거시적으로 보는 협동조합의 세계

세계적 흐름, 역사, 철학, 원칙, 선구자들, 사회교리와의 관계



협동조합이란 무엇입니까? 협동조합은 시장 실패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 즉 필요한 사람들이, 또는 필요한 노동자들이 실패한 시장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결성한 것이 바로 협동조합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약 180여년의 역사 동안 이것은 시장영역도 아니고, 정부 영역도 아닌 고유의 제 3의 영역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떤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협동조합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살아남아 있을 것입니다. 





2016년 3월 2일(수) 대전중앙시장 성당에서 '협동조합' 공부모임이 열렸다. 제목은 <협동조합을 소개합니다>. 이 공부 모임은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학습활동이며, 3월 한달간 매주 수요일 총 4회에 걸쳐서 매회 2시간씩 열릴 예정이다.


한국에 협동조합이 무려 6,000개? 진짜?


지금 한국에서도 협동조합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습니다. 2015년에서 2016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무려 6,000여개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협동조합도 기업활동을 하는 것인데, 공식적으로 보면 20~30% 정도가 활동을 한다고 말해지지만, 실질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약 10% 정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협동조합도 사실상 실제적으로 사업체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입닏. 그러나 사람들이 혹여나 지원이나 받을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많이들 시도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그들은 어떤 목마름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찾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이란 경제적인 필요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때로는 어떤 목마름이 있어서 그 당사자가 그걸 해결하려고 세웠지만, 그 목마름의 본질적인 영역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우리나라에 대략 3,000명 이상의 협동조합원이 있다.


그렇지만, 6천개 중 6백개 정도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가 있어요. 협동조합의 최소 단위는 5명입니다. 그래서 600개라고 하면 약 3,000여명의 조합원이 실제로 움직인다고 보는 겁니다. 특히 사업체가 움직이려면 이사장 1명과 직원 1명이 있다고 보았을 때, 최소한 1,200명은 월급을 받고 산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튼 협동조합이 생긴 역사를거슬러 올라가보면, 처음에 1800년대 초반에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전세계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지구상에 존재하는 협동조합의 갯수는 몇개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런 갯수가 의미있는 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단위협동조합의 갯수는 170만개입니다. 그리고 조합원 수는 10억명이고요.


지구 인구 5명 중 1명이 협동조합원이다


지구 인구를 대충 50억명으로 본다면, 5명 중 1명이 조합원인 셈입니다. 특히 미국인구도 절반도 협동조합원입니다. 주로 신협이 많습니다. 그런 현상이 있고, 과거 역사를 보면, 원초적으로 이상적 사회를 꿈꿨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혹은 오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분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영국의 사상가·사회주의자이다. 자신의 사상을 일컬어 최초로 '사회주의(soci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845년경의 초상화. 로버트 오언(1771~1858)은 웨일즈 북부의 신도시 몽고메리셔 뉴타운에서 생사를 맞이한 분이다. 국적은 웨일스이며, 사회개혁가, 공장주, 발명가 등으로 불리운다. 스코틀랜드에 신식 방직 공장을 갖게 되면서, 노동자 관리와 노동자 교육 등에 힘써 25년 만에 대기업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협동조합을 만들고 임금과 노동 조건을 좋게 고쳐 노동자에게 의욕을 북돋는 운동을 벌여 대성공을 거뒀다.


오언은 정말 공상적 사회주의자였을까


이 분을 역사적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 분은 공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재기발랄하고 진취적인 분이었어요. 공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입니다. 1771년에 태어나셨으니까 18세기 후반에 등장해서, 어릴적 독학을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에는 소질이 없던 분이었어요. 그런데 장사 수완은 좋았습니다. 옷감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당시 옷감 장사란 것이 지금의 반도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부에 뜻이 없고 어릴 적부터 장사에 수완이 좋았으며.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산업혁명의 부정적인 면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꿈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공장주가 되면 노동자를 혹사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오언은 자신의 이러한 이상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뉴라나크에서 펼쳐진 오언의 실험


오언은 스코틀랜드 방직 공장 사장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서 갑부집 사위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장인 어른이 실제로 방직공장을 사위 오언에게 맡깁니다. 그렇게 1802년도에 (그의 나이 만 31세에) 장인에게서 물려받은 방직 공장으로 직접 사업을 합니다. 그게 역사적으로는 뉴라나크(New Lanark, 뉴래너크) 지방의 방직 공장입니다. 그곳에는 당시 2,000명 노동자들이 있다고 했을 만큼 아주 커다란 공장을 실제 운영했던 것입니다. 



아동 노동 All Stop!, 학교를 지어줄 테니 다녀라!


오언은 그래서 꿈을 실천합니다, 7세부터 12세까지의 아이들에게는 노동을 시키지 않고, 공장 옆에 학교를 지어서 공부를 시킵니다. 그렇게 공부시킨 아이들이 무려 5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13세부터 18세까지의 아이들에게는 하부 절반의 시간만 노동을 시킵니다. 당시 절반이라면 7시간입니다. 그리고 성인노동자는 하루 14시간 넘지 않게 일을 하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루 8시간 노동이 기준이니까, 하루 14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망하지 않았던 이유


두번째로 오언은 일만 그렇게 시킨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살 수 있게끔 집을 지어줬습니다. 방 두칸 짜리를 지어서 노동자 가족이 살 수 있게 하고 생필품도 싸게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협동조합의 이상을 갖춘 촌락을 만든 것이죠. 바로 그것이 공장주 오언의 업적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유명해지면서, 전 유럽에서 이걸 다 보러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진짜 멋있다!" 그러면서 "그런데 어떻게 아직까지 안 망하고 있어?"라는 거였어요. 


휴머니즘을 추구한 오언


오언이 추구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최초로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 조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노동자를 인간으로 대우한 것입니다. 노동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아니란 것이죠. 


점진주의를 추구한 오언


오언이 추구했던 것의 두번째는 점진주의입니다. 변혁과정에서 점차적인 변화를 꾀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이 정치 투쟁과 시회주의 혁명에 물들어가면서 혁명을 통해 싹 갈아엎자는 운동도 일어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언은 오언은 점진주의적으로 순서대로 하나 하나씩 변화되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입니다.


협동조합의 갈길을 보여준 오언, "나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오언의 이러한 기본적인 사고 방식은 협동조합이 갈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오언은 20년간 운영하던 방직공장의 문을 닫습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문을 닫게 된 것인데요.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눈에 딱 들어오기 전에 로버트 오언의 실험을 통해서 사람들이 "정말 할 수 있겠다!, 협동의 방식으로 힐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 레옹 아멜의 실험에 깊은 감동을 받은 피터 모린


도로시 데이(1897~1980)와 함께 '가톨릭 일꾼' 운동을 창시한 (꿈꾸는 예언자) 피터 모린(1877 ~ 1949)의 책에는 '레옹 아멜'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멜이란 사람도 방직공장을 합니다. 아멜은 노동착취에 반대합니다. 그래서 공장위원회를 구성하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연합단체를 만들죠. 노동자와 경영자의 협력적 사업운영을 추구한 것입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건강 보장을 고용주의 의무로 여겼고, 건강한 육체뿐 아니라 궁핍한 영혼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준 높은 종교적 환경을 제공하기까지 했습니다. 레옹 아멜이란 프랑스 사람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노동자와 경영자가 손을 잡고 성당에서 주일미사에 참여하면서 종교적 신성도 함께 다져 나가며 그걸 바탕으로 협력적 관계를 꾸려나갔습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연합단체 함께 만들어 상의하며 경영하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장 근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나아가 성당 안에 자선단체를 만들어 아픈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도왔고, 마침내 노동자와 고용주가 모두 성 프란치스코 제3회(재속)에 가입했습니다. 이러한 아멜의 실험에 피터 모린은 깊이 감동했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프랑스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는 건데요. 아무튼 오언은 오랫동안 실제로 협동조합의 모습을 성공시켰던 사례로 꼽힙니다. 


협동조합 제1호점은 로치데일 소비자 협동조합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는 순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첫번째는 소비자 협동조합인데요. 영국의 로치데일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로치데일(Rochdale) 소비자 협동조합은 성공한 협동조합의 제1호에 해당됩니다. 지금 170만개에 달하는 협동조합의 첫번째 원조가게리고 할 수 있어요. 협동조합이 성공하려면 채워져야 하는 것이 바로 '목마름'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목마름이란 것은 사람들이 1843년에 세웠는데, 1840년대 당시는 산업혁명 중반기였습니다. 노동운동이 굉장히 왕성하게 이루어졌고, 임금도 크게 오르고 노동시간도 10~12시간 정도로 줄어들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10세 미만의 노동도 금하게 된 시점이었으며, 비록 허름하긴 하지만 노동자 합숙소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형태를 갖추돈 때이기도 합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아는 유명한 축구도시들이 그 시절에는 주로 노동자들이 밀집된 지역이었습니다.





생필품이 가장 필요했다!


로치데일은 맨체스터에서 (대략 20km) 좀 떨어진 조그만 도시였습니다. 인구는 약 65,000명 정도였으며, 그 당시 수요보다는 공급이 더 강력해서 맘대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생필품이었습니다. 구입도 어렵지만, 가격 등락도 잦은데다가, 물건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입니다.  


특단의 대책, 노동자 28명이 힘을 뭉쳤다! 


그래서 너무 심한 상인들의 악한 행태에 맞서 28명의 노동자들이 특단의 대책을 세웁니다. 1파운드 씩 출자를 하고, 28파운드를 모은 겁니다. (지금은 1파운드가 1,700원 정도지만) 그 당시 1파운드는 노동자 한달 월급의 절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 가게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된 것이었고, 그렇게 가게를 엽니다. 그러면서 9가지 물건을 조달받습니다. 그리고 노동자 28명과 그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가게를 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물건값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이용실적 배당'


다만 중요한 것은 속임수가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는 사람도 조합원 28명에다가 노동자 가족이 더해지겠죠. 그래서 신뢰가 쌓입니다. 결정적인 협동조합 방식의 핵심적인 내용이 여기서 만들어졌는데. 바로 이용실적 배당이란 것입니다. 남은 돈을 나누는데, 돈많이 출자했다고 더 많이 배당해주지 않고, 물건 더 많이 산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죠. 즉 자본의 방식이 아니라, 이용의 방식, 교환의 방식이었던 겁니다. 그런 시스템을 가져왔고, 그래서 성공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점점 조합원 늘어나고 생필품을 더 조달하게 되었어요. 


외상 사절!, 현금만 주세요! 그리고 시장가격


그리고 중요한 원칙은 현금거래였다는 사실이에요. 그 전에 다 망했던 건 외상거래때문이었습니다. 외상은 사절하고, 현금거래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협동조합 원칙의 첫번짼 외상사절, 두번째는 시장가격, 즉 제값받고 팔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년이 되지 않아 유럽 전역의 노동자 밀집지역으로 이것이 퍼지게 됩니다. 그렇게 2,000개의 협동조합이 생게는 거죠. 바로 목마름, 어려움이 해결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호주, 아시아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1호점은 지금도 박물관으로 사용하니까, 현지에 가면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아쉬운 사람들이 자신들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의 장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로치데일 … 1844년 8월 13일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설립이 근대적 협동조합의 효시가 된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소비자협동조합 운동, 그리고 오늘날의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 이른다. 


1844년 8월 13일 로치데일 공정선구자조합 설립... 28명의 선구자들은 사회주의자, 참정권확대운동가, 근로시간단축운동가, 감리교도, 금주운동가 등 다양한 구성원이었다. 


로치데일은 영국의 축구 잘하는 맨체스터에서 20키로 떨어져있다. 노동자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들고,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막 시작할 때, 시골에서는 사람들을 내쫓고 양을 키운다. 쫓겨난 이들은 도시로 가서 공장에서 노동을 했다.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운동이 축구이다 보니, 맨체스터가 축구로 유명해졌다. 부자들은 테니스 잘하는 도시 윔블던에 사는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윔블던은 잘 사는 사람들 도시이다. 1844년의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오늘날의 성공모델이다. 그 당시 생필품이 필요한 노동자들이 돈을 모이 가게를 차리고, 공장에서 직접 떼온 물건을 쌓아놓고 출자금을 낸 조합원에게만 약간의 마진을 붙여서 판매를 했다. 1년동안 가게를 운영한 후 운영비를 뺀 나머지 잉여금을 물건을 많이 구매한 조합원들에게 많이, 적게 산 조합원들에겐 적게 나누어주었다. 일종의 이용실적배당입니다. 가게운영을 위해 조합원들이 모여 총회 모두가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고 1인1표로 가게 운영자 이사장을 뽑았다.

- 2015년 4월 1일 조세종 박사 사회교리강의 '경제생활과 윤리' 중(@하기동 성당) 



신용협동조합


그 다음 협동조합 등장은 독일로 넘어갑니다. 바로 라이파이젠 신용협동조합입니다. 신협은 현대의 전세계 규모 중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입니다. 여기서 규모가 크다는 건 그곳에 가입한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프랑스 신용협동조합은 2천조원의 규모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은행들의 모든 자산을 다 합친 금액보다도 많은 규모입니다.

프랑스의 ‘농협’으로 불리는 크레디아그리콜(CA)은 협동조합에서 시작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20년 늦게 시작한 독일의 라이파이젠 신협


독일은 산업혁명을 늦게 시작했죠. 그래서 1844년의 로치데일보다 20년 뒤인 1860년대에 시작이 됩니다. 이른바 영국의 로치데일은 지명인데, 독일의 라이파이젠은 사람 이름입니다. 라이파이젠이 살던 지역은 독일의 농촌 지역이었어요. 그는 면장이었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그가 보아하니, 농민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운 거였습니다. 그런데 농민들은 술도 안 먹고 노름도 안하면서 농사를 열심히 짓고 있는데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고리대금이 문제였다


그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은 군대와 산업이 나중에 잘 발전하며 강력한 나라가 되는데, 이 당시 토재개혁도 잘 되었고. 정부가 개혁적으로 일을 하던 비스마르크 등이 나오면서 토지개혁도 잘 되었고, 자작농 비율도 높았지만, 그래도 못 산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고리대금때문이었습니다. 


봄에서 가을까지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하는데, 그 전에 농사를 짓고 살림하려고 빌린 돈이 있었습니다. 고리대금의 악순환 때문에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죠. 바로 이것이 목마름이었던 거죠. 그래서 처음에 30명이 모였어요. 농민 30명의 돈을 모아 조합을 만들고, 가장 가난한 이부터 고리대금 이자의 절반으로 돈을 빌려줍니다. 그렇게 하니까 농민들 삶이 나아졌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에 라이파이젠 신협이 만들어집니다. 그런 다음에 이것 역시 아메리카로, 호주로, 아시아로 퍼져나갑니다.


Friedrich Wilhelm Raiffeisen (1818~1888). 라이파이젠은 슐체 델리취(1808~1883), 윌리암 하스(1839~1913) 등과 같이 독일 신용 협동조합 선구자들이다. 이 셋은 저마다의 사상으로 신협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라이파이젠계 신협은 농촌의 자연마을을 중심으로 농민 조합원을 위한 윤리적, 도덕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래서 도시 중심의 순수한 경제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한 술체계 신협과는 대조적인 면이 많다.



라이파이젠 - 신협 … 협동조합의 선구자. 라이파이젠은 그리스도교적 이웃사랑을 바탕으로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이들은 고리대금업자에게 가축이나 토지를 이용한 대가로 착취당하고 궁핍에 내몰리던 농민들을 구제하려고 신협을 설립한 것. 전통적인 독일 농민들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농촌대부사업을 시작했고, 가난하여 출자하지 못하는 농민들에게는 장기신용대출을 해준다. 이처럼 물질적 충족과 함께 윤리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을 중시하는 신용협동조합은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 2015년 4월 1일 조세종 박사 사회교리강의 '경제생활과 윤리' 중(@하기동 성당) 




메리 가별과 장대익


그러면 우리나라의 경우, 신용협동조합은 언제 들어왔을까요? 1960년 메리 가별 수녀님에 의해서 들어왔습니다. 가별은 가브리엘라은 한글로 표현한 겁니다. 원명은 Mary Gabriella Mulherin인데, 가별 수녀님으로 널리 통한다고 해요. 수녀님은 1900년 5월에 태어나셨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입니다. 한국에는30세가 되는 1930년에 오셨습니다. 미국 메니롤회 소속의 선교사로 온 것인데, 20년간 신의주와 평양 근교 명주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셨고, 1950년 6-25를 함께 겪으시다가 미국 하와이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스스로 해결할 힘을 길러줘야 한다


그리고 가별 수녀님은 1952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부산 메리놀 병원에서 구호사업을 했는데, 특히 전쟁 미망인들을 위한 복지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전후 복구 작업에 참여하면서 "한국 문제는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57세에 캐나다 사베리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 대학은 협동조합 분야에서 가톨릭 계통 대학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곳에 가서 신협을 배우고 다시 한국에 오신 겁니다.  


가별 수녀님 - 부산 성가신협


이른바 안티고니쉬 운동을 연구하고 한국에 다시 와서 자조, 자립협동을 기조로 하는 협동 조합 운동을 한국에 소개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것이 한국 신용협동조합 운동의 태동입니다. 1960년대는 전쟁 이후로 참 어려운 시절이었죠. 그런데 수녀님이 보시기에는 단순한 구호품의 배급보다는 자립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60년도에 부신 성가 병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성가 신협을 세웁니다. 그 당시 달러 이자는 7부 이자였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한달에 7%였고 그러면 1년에 이자가 84%였던 겁니다. 이것을 2부 이자로 낮춘 게 신협이었고, 그렇게 신협이 시작되었습니다.


장대익 신부님 - 가톨릭 중앙신협


그러면서 한국의 장대익 루도비코 신부님이 이 정신을 그대로 받아서 서울에서 가톨릭 중앙신협을 만듭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모든 신협은 이 두 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계열은 라이파이젠입니다. 


참고로 신협 중앙연수원은 대전에 있습니다. 거기에 라이파이젠 동상이 있어요. 그런데 2012년 신협 선구자 추모식이 있었는데, 그 두 분을 기념하는 추모식을 했다는 겁니다. 모든 대한민국 신협 간부들이 모여 이 분들을 추모한 것이죠. 


2007년 2월 15일, 한국신협운동의 어머니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의 동상 제막식이 신협중앙회에서 열렸다. 권오만 중앙회장 및 메리놀 수녀회 앤, 노리에 수녀 등 참석자들은 고인의 생전 한국 신협에 대한 깊은 사랑을 기렸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한국으로 건너와 1960년 한국 최초의 신협인 ‘성가신협’을 창립했으며, 1993년 5월 9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출처. 신협뉴스게시판)



생각해보면, 제가 어릴 적 인천교구 소사 성당을 다녔는데, 그 시절에도 성당에 신협이 있었습니다. 이사장은 총회장이 겸임했습니다. 친구 아버님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 기억이 있는데, 지금 신협을 보면, 아무 곳에서나 가입이 되지 않습니다. 국지주의 성격이 있고, 가톨릭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아쉬운 것은 가톨릭으로부터 떠나버렸는데, 그 인연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겁니다. 


 


6.25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궁핍해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사회적 혼란기였다. 따라서 저축을 하거나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메리 가별 수녀는 1960년 5월 1일 , 부산에서 메리놀 병원 직원과 천주교 교우 27명을 조합원으로 성가신협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신협의 시초이다. 장대익 신부는 같은 해 6월, 서울에서 가톨릭 교인을 대상으로 중앙신협을 설립해 한국 신협의 확산에 불을 당겼다.



장대익 신부님이 세운 게 가톨릭중앙신협인데. 그게 이름을 바꾸어서 협동교육 연구원이 생깁니다. 여기서 신협 사람들만 교육시키는 게 아니고, 협동조합, 노동운동자 등을 많이 교육시켰습니다. 1970-1980년대. 그리고 이들이 원주로 갑니다. 바로 지학순 주교님이 계시던 곳이죠. 그곳에서 원주의료생협이 만들어지고, 한살림도 만들어집니다. 면면히 그런 정신이 이어온 것입니다. (계속)


'죽 쒀서 개 준' 꼴인 한국 신협 운동 ... 프레시안 2011.9.22




노동자 협동조합에 대해서


소비자 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에 대해서 앞서 말씀을 드렸고, 그 다음으로 말씀을 드릴 것은 노동자들입니다. 즉 노동자 협동조합입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함께 사는 공동체의 전통이 강합니다. 길드가 그런 사례인데요. 유럽에서 협동조합 결성이 잘된 곳은 다 가톨릭적 전통이 깃든 곳입니다. 


중세의 해체 이후, 길드 장인들의 목마름은 무엇이었을까?


길드의 영향을 받던 장인들의 협동조합이 당시 노동자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닌 목마름은 무엇이었을까요? 1850~60년대는 이미 중세가 해체된 시절입니다. 장인들에게 기술은 있었지만, 개별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겁니다. 다시말해서, 장인들은 장사가 안되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이죠. 즉 시장의 실패를 정부가 도와주지 않습니다. 경기는 불황이고,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으며, 혼자 물건을 만들고 팔아야 하는 등의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모아서 공동 작업장을 두고,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시장에 내다 팝니다. 그것이 더 나아가면 공동 브랜드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런 게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브랜드가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생디 칼리즘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또 한쪽에서 요리노동자, 서빙노동자 등은 조합을 결성해 식당을 만든다거나, 피아노, 바이올린 등은 오케스트라 노동자 협동조합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어요. 유럽 남부지방에서는 생디 칼리즘 이란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이른바 혁명적 조합주의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식처럼 의회나 정치투쟁으로 노동자가 의회 장악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조합 방식으로 경제투쟁을 하자는 이들이 주로 모여있는 것이 협동조합입니다. 그러면서 정치적 색깔이나 종교적 특성같은 것들이 어떤 선후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자연발생적이며, 그렇게 협동조합 방식이 확산되고 정착되었디고 볼 수 있겠습니다. 


생디칼리즘(勞動共産主義, 프랑스어: Syndicalisme) 또는 혁명적 조합주의는 불리며 산업일선에서 노동자계급의 활동을 통해 자본가 사회를 붕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다. 19세기 말에 처음 등장한다.


서울 택시 협동조합의 성공사례


협동조합의 사례를 볼 때 요즘 한국에서 각광받는 것이 택시입니다. 서울은 성공했다고 보고요, 울산도 하고 있습니다. 택시 협동조합, 이른바 쿱택시라고 합니다.


뛰뛰빵빵 쿱택시의 행선지는 평생직장 ... 한겨레 2015.10.31



생산자 혹은 사업자 협동조합 - 농협 같은 것


그 다음 생산자 협동조합, 혹은 사업자 협동조합이란 게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농협이죠. 우리나라 농업협동조합이 전세계 농협의 세번째 규모입니다. 매출액 320억 달러, 42조원 매출이에요. 여러가지 부침이 있기는 했습니다. 이사장을 관에서 꽂으면서 변질된 역사도 있지만, 우리나라 농협은 거대 협동조합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세계적 생산자 협동조합은 1860년대 독일, 덴마크 지역인데, 이미 농민들은 신협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라이피이젠 계열과 슐체 계열 두개가 있는데, 저는 주로 라이파이젠 계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라이파이젠의 인간적 위대함


라이파이젠은 돈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가난한 이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이런 정신의 바탕 위에서 신협의 경험 가진 이들이 농협을 만들었는데, 그들의 목마름이란 가을 수확을 해서 자기 먹을 거 갖고 오고, 자기가 직접 팔러나갔는데 잘 팔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면 중간상인에게 넘기죠. 배추 하나에 100원에 넘기면 중간상안은 1,000원에 파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폭리입니다. 턱없는 중간 유통마진인데, 사실 이 마진의 일정한 부분은 농민들 것입니다. 그래서 농민들 것을 상인들에게 뺏기지 않고 파는 게 구판장입니다. 구판장에서 농민들이 돈을 모아 유통회사를 만드는 데 그것이 바로 농협입니다. 거기서 농산물 판매 외에도 씨앗이나 기구 등을 공동 구매하고, 그걸 보고 축협이 생겨나죠. 축협도 마찬가지로 공동구판장 만들고, 노량진 수산물 시장은 수협에서 합니다.


그렇게 시장의 실패, 목마름, 그런 지역을 없애려고 스스로 농민들이 만들었고. 북유럽의 대부분의 공급 우유가 축협에서 만들어집니다. 우리나라 서울우유도 축협에서 만들죠. 제스프리 키위도 뉴질래느 협동조합입니다. 폰테라 협동조합은 뉴질랜드에서 유제품을 만드는 곳입니다. 뉴질랜드의 경우 국민총생산의 20%가 협동조합에서 만들어진 제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협동조합 ‘폰테라·제스프리’를 아시나요 ... 한겨레 2011-9-13 




주택, 보건 협동조합의 사례


그 다음은 주택, 보건 협동조합입니다. 주택협동조합은 어디서 많이 나타났냐면, 영국입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시장의 실패였나요? 노동자들이 이제는 안정적으로 생필품을 공급 받는다지만, 그 당시 영국 주택은 저택에 정원이 있고 근사한 규모를 갖추었어요. 그런데 노동자들은 실제로 그런 곳에 거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구책을 세우고 공동으로 돈을 모아서 노동자의 집을 짓습니다. 계속 돈을 모으고 땅을 사고 건물을 짓습니다. 그것이 아파트의 최초 모델이 됩니다.


그래서 180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주택보급율 끌어올리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고, 정원이 딸린 집을 구입하지 못하니까 이런 사람들이 자구책으로 도시 거주지역에서 아파트를 만들게 되는 거였죠. 


스위덴의 의료 협동조합


의료협동조합은 어디서 발달했을까요? 바로 스웨덴입니다. 그 당시 이곳의 어려운 점은 스웨덴 농촌에서 의사가 없다는 점이었어요. 그러니까 대도시에서 의사가 오지 않으면 환자가 죽습니다. 그 자체로 시장의 실패이며 목마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돈을 모아서 의사를 초빙하고 1차 진료를 시작합니다. 지금 스웨덴 동네 1차 병원의 70%가 협동조합 병원입니다. 이처럼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하듯이, 정확한 목마름을 알아야 협동조합이 성공합니다. 


네델란드 풍차 협동조합


그 밖에 재미난 협동조합으로 네델란드 풍차가 있어요. 풍차의 90%가 협동조합입니다. 그 당시 물을 빼내지 못했죠. 그 당시의 네델란드는 전 국토의 3분의 1이 그런 지역이었는데, 정부가 하지 못하니까 풍차를 만들어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미국의 화력발전 협동조합


미국은 화력발전 협동조합이 유명합니다. 광활한 지역에서 전기가 필요해도 쓰지를 못합니다. 왜냐면 전기밧이 너무 비쌌던 겁니다. 그 당시에도 제네랄 일레트릭이나 웨스팅하우스 같은 전기회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제공하는 비싼 전기를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1900년도는 미국이 잘 살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40개 주의 주민들이 돈을 모아서 화력발전소를 짓습니다. 아직도 미국인 중 4천만명이 협동조합 조합원입니다. 많은 부분이 전기협동조힙 조합원인데, 전기를 자기들 출자한 회사에서 끌어다 씁니다. 


아르헨티나의 전화 협동조합


아르헨티나는 성공적인 사례는 그들이 아쉬웠던 부분인 전화였습니다. 그 나라 정부는 전봇대도 못 세울만큼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전화가 대도시에만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까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전봇대를 세우고, 지금도 500만명이 전화 협동조합원입니다. 


천지에 다 협동조합들이다


사실 우리는 협동조합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천지에 협동조합입니다. 농협이나 신협 등이 그런 것인데요. 많은 협동조합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시점에서 목마름이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면 다른 비슷한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기업들과 경쟁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협동조합과 일반기업 차이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때, 정체성의 위기가 닥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과제로 던져진 것이 3가지이며, 그 과제를 해결하려는 작은 불씨들이 보이는 겁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3가지 협동조합의 과제


그 첫번째는 환경파괴입니다. 협동조합은 환경파괴와 자원낭비를 해결해야 합니다. 두번째 고용문제 혹은 실업문제이며, 세번째는 빈곤문제입니다. 이런 것을 해결하고 극복해야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


환경파괴의 문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사례가 과연 있을까요? 그걸 어디에서 보냐면,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환경 파괴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이쿱이나 한살림 등이 무엇부터 시작했는가 하면, 농약 안치는 것과 유기농하는 것. 바로 이것부터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 점점 사회의 눈 높이를 올리게 만들었죠. 그리고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나간 겁니다. 그리고 친환경 유기농산물 등으로 횐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작지만 기여를 합니다. 


고용의 문제


두번째는 고용문제입니다. 제가 되근에 몬드라곤에 대한 기사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썼습니다. 그 사례를 보면 어떤 방식으로 되는지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문화 | 책] "호세 마리아 신부의 생각"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박정훈 옮김,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2016

2016-2-29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조세종 박사 글 


[기사 중 일부] 최근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체계에 대안이 되는 다른 경제 체계로 떠오르고 있기에 아리스멘디 신부님의 생애와 신앙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한 이 즈음에 "호세 마리아 신부의 생각"이 발간되어 더욱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님은 1915년에 나서 1976년에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스페인 파시스트 독재와 수난의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사회교리를 토대로 경제 영역에서 온 생애를 다 바쳐 신앙인이 현대사회에서 가야할 사회적 지침을 제공하신 분이다.


2012년 현재 몬드라곤 협동조합 그룹은 금융, 유통, 산업, 교육연구 등 4개 부문, 290여 개의 협동조합에서 8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총자산 규모는 360억 유로(51조 원)이며 세계적인 경제 침체에도 산업부문에만 58억 유로(8조 원)의 매출을 유지하였다. 몬드라곤에 비견할 만한 한국의 재벌기업은 현대중공업이나 GS 정도 될 것이다. 몬드라곤 협동조합과 한국의 재벌기업과의 차이는 수익이 날 때 몬드라곤은 수익 전체를 전체 노동자가 나누지만 한국의 재벌기업은 소수의 주주가 차지한다. 그 차이는 단순하지만 본질적이다.



빈곤의 문제


세번째는 빈곤 문제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사회적 협동조합이 1980~90년대에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사회적 협동조합 제도는 원천적으로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이들, 또는 장애인 같은 분들의 자활과 생존을 협동조합에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가면을 쓴 민명화라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분들도 있지만 모든 것이 사실 처음부터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협동조합의 앞으로의 과제까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잠간 쉬었다가 이제 협동조합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으니까 이제 지역적 특징과 협동조합의 실체적 의미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6.3.2 수, 8:18pm, 1부 강의 끝)


위 내용은 기록자의 편집으로 인해서 실제 강의내용과 차이가 있습니다.


대전 중앙시장 성당.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협동조합] 학습모임. 2016.3.2(수) 저녁 7시~9시20분 중 1부

강사 조세종 박사는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며 대전사회적경제연구원 소셜비즈니스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대해서

1. 교황이 인가한 세계적인 공동체. 재속프란치스코회(Ordo Franciscanus Saecularis)는 성프란치스코 가족 중의 하나로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온세계 모든 평신도와 재속 사제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또한 가톨릭 교회안에서 교황이 인가한 회칙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단위, 지구, 국가, 국제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공동체이며, 각각의 형제회는 교회 안에서 법인으로 인정받는다.

2. 성프란치스코 영적 가족 중의 하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신 영적 가족은 1, 2, 3회가 이다. 1회는 프란치스코남자 수도회이고, 2회는 가난한 글라라 회라고 불리는 여자 수도회이며, 3회는 재속 신분으로 구성된 재속프란치스코회와 수도자인 수도3회가 있다. 이 영적 가족은 800년 동안 그 숫자가 수천만에 이르고 현재의 가족수도 100만이 넘는다. 이들 세 가족은 활기에 찬 친교를 이루면서도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실천한 빛나는 영성들을 각기 다양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실천한다.

3.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전국적으로 124개 단위 형제회와 10,0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지원자격은 만16세 이상의 성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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