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며칠 전 대학원 동료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상담심리학의 세계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그 분은 대학원 교재는 아니었지만, 노안영의 저서『상담심리학의 이론과 실제』란 책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제11장 실존주의적 상담 편 중 3쪽 분량의 본문에 대한 내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 책은 나도 갖고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 분에게 나의 해설을 보내드렸으며, 요한의 대학노트에도 기록을 남긴다. 일단 책의 실물 모양은 다음과 같다.
상담심리학의 이론과 실제 (노안영) | 학지사 | 2005-08-20 | 정가 18,000원
다음은 이 책의 269~271쪽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본문(269p)
4) 죽음과 비존재
셋째 죽음과 비존재다. 실존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다. 인간은 역시 미래의 언젠가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한다.
• 해설
실존철학의 최대 이슈는 죽음이다.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는 알게 된다. 그게 유한성이다. 여기서는 '비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죽음과 비존재는 맥락상 같은 말이다. 그러나 '비존재'란 표현은 좀 어색하다. 아무튼 교재의 비존재(非存在)라는 표현에서 ‘비(非)’는 ‘아니다, 등지다, 배반하다, 거짓이다.’ 등의 사전적 정의를 갖는다. 그래서 ‘비존재(非存在)’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를 배반하다’, ‘거짓존재이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존재’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존재가 아니다.’란 표현인데, ‘존재하지 않음’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죽음을 자각한다는 차원에서 ‘유한성(有限性)’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젊어서 팔팔할 때는 죽는 게 실감나지 않지만, 장례식장을 가면 바로 실감한다. 그곳에서 즐거운 노래를 기쁘게 노래하지 않는다. 슬픔을 나눈다. 장례식장에 가면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을 의식의 영역에서 생각한다. 죽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이며, ‘존재’에서 ‘존재하지 않음’으로 향해가는 인생을 생각하는 순간이다.
본문(269p)
죽음은 가장 자기적인 것이다. 누구에 의해서도 대신 죽어 주기를 바랄 수 없는 언제나 자기가 맞이해야 할 사건이다. 이처럼 죽음은 자기의 궁극적인 가능성이다. 다음에 죽음은 모든 교섭의 단절이다. 죽음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요, 다른 무엇과도 무교섭적이다.
• 해설
죽음은 개별적이다. 보편적이지 않다. 남이 죽으면 장례식장을 방문할 수 있지만, 내 장례식에 내가 방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죽음은 자기의 종말이다. 죽음이 왜 궁극적 가능성이냐면, ‘궁극(窮極)’이란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궁(窮)도 끝이고, 극(極)도 끝이란 뜻이다. 인생 여정의 최종 목적지가 죽음인 거다. 인생 여정의 최종 단계에 이루어질 100%의 가능성이 죽음이다.
‘교섭의 단절’이란 관계의 단절이다. 죽은 사람이 자기 명함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건넬 수 없다. 다른 무엇과도 ‘무교섭적’이란 표현으로 이해하면, 죽은 자가 임금인상을 위해 노사교섭단체를 꾸릴 수 없다. ‘죽음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요.’란 표현은 남의 일이 아니란 뜻이다. 내가 죽으면 내 일이고, 너가 죽으면 너의 일이다. 나 죽는다고 남이 따라죽는 건 비정상이다. 그래서 따라 죽으면 ‘베르테르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본문(269p)
또한 죽음은 넘어설 수가 없고 또 가장 확실하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실존은 죽음에의 존재요, 종말에의 존재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이며 그 밑바닥에는 무가 잠겨 있다. 이 무 때문에 실존은 불안하다.
• 해설
죽음을 넘어설 수 없다. 살아있는 상태로 죽음을 지나서 갈 수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죽음이란 ‘돌아가셨다’로 끝난다. ‘돌아가셨다’에서 ‘되돌아오셨다’가 될 수 없다. 되돌아올 수 없는 게 죽음이다. 영영 저 멀리 떠나는 것이므로 별세(別世, 세상과의 이별), 기세(棄世, 세상을 버림),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 서거(逝去, 사거의 높임말), 선종(善終, 가톨릭용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음), 적멸(寂滅, 불교용어, 사라져 없어짐), 영서(永逝, 영원히 간다), 영면(永眠, 영원히 잠든다) 등으로 표현한다. 영어로는 멀리 가셨으니 Pass away라고 한다. 이 때, 부귀와 명예를 몽땅 가지고 저승의 세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 게다가 죽음 이후를 모르니 불안하기만 한데, 몽땅 비우고 갈 수 밖에 없으니 더 불안하다. 살면서 가득 채웠던 부귀와 명예를 모두 버릴 수 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삶의 밑바닥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으니 ‘무(無) 밖에 남은 게 없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니 실존은 불안하다.
본문(269p)
그러나 실존은 자기를 기만함이 없이 결단을 내리고 이러한 유한적 실존인 실존방식을 엄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의 양심이란 일상인의 일상성 속에 은폐된 미래의 자기가 스스로를 구하고 그것을 결의하기를 강요하는 외침의 소리다. 이 양심의 소리는 자기를 향해 외친다. 이 결의는 죽음에의 불안을 그대로 죽음에의 자유가 되게 한다. 이 결의란 자기가 열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도리어 자기의 환경과 대결하고 바른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 해설
이 문단의 핵심어는 ‘결의(決意)’란 단어이다. ‘결의’란 ‘뜻을 정하여 마음을 굳게 먹는다’는 말이다. ‘단호한 의지’라고도 할 수 있고 ‘결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죽음과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결심을 하란 뜻이다. 어차피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아닌 척 하지 마라! 적극적으로 인정해라. 그래서 ‘의지’가 중요하다. 이 문단에서는 ‘결의’와 ‘양심’을 연결시킨다. ‘양심’은 도덕적 의식이며 ‘올바른 결의’이다. 그래서 실존주의의 핵심인 ‘본질보다 앞선 실존’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의하기를 강요하는 외침의 소리다. 이 말은 그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게 인간의 죽음(유한성, 비존재)이란 거다.
또한 ‘일상인의 일상성’이란 쳇바퀴처럼 반복적인 하루하루를 말한다. 습관적인 삶의 모습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즉 오늘과 같지 않은 내일이 되려면 내일을 계획하는 의지를 갖고 오늘을 바꿔야 한다. 그걸 미래의 자기가 오늘의 나에게 외친다라고 본문에는 표현되어 있다.
본문(269~270p)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는 미래의 개념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점차적인 비존재의 인식 그것이 존재에 의미를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행위를 중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 해설
지금 이 순간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수 있다.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래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 이 순간을 소중하게 보내야지!”라고 매순간 결심하는 걸 말한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50년을 더 살 수도 있다. 오늘 죽을 수도 있고,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이걸 인간은 알지만 동물은 모른다. 인간만 아니까 인간의 현저한 특징이다. 인간만이 뚜렷하게 ‘미래개념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터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 자체는 슬픈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죽음 때문에 삶이 소중하다. 내일 죽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오늘이 소중하다. 1분 후에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지금의 1분이 소중하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행위가 중요하다.
본문(270p)
실존주의자들은 삶이 시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실현화시키는 영원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면 조급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성 때문에 죽음은 우리에게 진지하게 생을 살아가도록 자극한다. 죽음의 불가피성은 생의 가능성을 제한시킨다. 현재는 귀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가진 전부이기 때문이다.
• 해설
앞선 문단을 부연한 문단이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진지하게 살자는 이야기다. 유한성을 시간의 제한성, 죽음의 불가피성, 시간성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270p)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에 대한 두려움은 서로 관련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두 팔을 벌려 생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 중의 어떤 이에게 불안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만약 가능한 한 최대로 현재의 생을 긍정하며 살아가도록 시도한다면 생의 종결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무서워한다. “결코 참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중 어떤 이는 자신의 죽음을 실제로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비존재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허무와 직면하는 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메이(May 1961)는 “죽음을 부정하는 데 치러야 하는 대가는 막연한 불안과 자아격리다.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은 죽음에 직면해야만 하고 개인적인 죽음에 직면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 해설
두 가지 두려움이 있다. 생(生)과 사(死)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관련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관련 된다’보다는 ‘연결 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생과 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연결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두 팔을 벌려 생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 중의 어떤 이에게 불안스럽게 다가온다. 어색한 표현이다. 읽다가 난독증을 일으킬 수도 있는 문장이다. “두 팔 벌려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까지 두 팔을 벌려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똥밭에서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라는 속담으로 이해하면 쉽다. 죽음을 실제로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라는 본문은 ‘죽음을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실존주의적 주장이다. 점차적으로 비존재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에서 ‘점차적으로’라는 표현은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될 거 같다. 점차적이니까 1세, 2세, 3세에서 갑자기 50세를 먹는 게 아니라, 매년 점차적으로 한 살, 두 살 먹는다는 표현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죽음은 점점 더 큰 인생의 숙제가 된다. 또래 친구의 장례식장에서는 개별적인 존재인 ‘나의 죽음(비존재)’이 머지않은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죽음이 무섭고 피하고 싶다. ‘존재의 밑바닥’인 ‘무(無)’, 존재의 종착점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허무(虛無)’이다. ‘허무’는 궁극(窮極)처럼 반복적으로 강조한 표현이다. ‘허(虛)’도 없다는 뜻이고, ‘무(無)’도 없다는 뜻이다. 텅 비고 없다는 강조 용법이다. 다른 말로 ‘빈손’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이다. 무에서 시작하여 무로 끝난다. 허무한 게 인생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데 치러야 하는 대가는 막연한 불안과 자아격리다.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은 죽음에 직면해야만 하고 개인적인 죽음에 직면해야만 한다.” 롤로 메이가 한 이 말을 부연하면 이렇다. “죽음을 부정하면 더 불안해진다.” “죽음을 부정하면 유체이탈 화법만 쓴다.”, “너는 혼자 죽는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이중인격자가 된다.”
본문(270p)
프랭클(Frankl, 1959)은 메이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죽음은 “인간실존에 의미를 준다.”라고 말한다. 그는 “만약 우리가 불멸하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동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는 것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지적하였다.
• 해설
사실 다 중언부언하는 문장들이다. 불멸(不滅)이란 ‘무한성’이다. 삶은 불멸이 아니라 적멸(寂滅, 불교용어, 사라져 없어짐)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앞선 설명으로 충분하므로 설명생략.
5) 진실성
본문(270p)
넷째 진실성이다. 신학자인 틸리히(Tillich, 1952)는 존재할 용기란 말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내부에서부터 살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용기라고 하였다. 우리존재 내에 깊은 핵심을 발견, 창조, 유지하는 것은 어렵고 끝이 없는 노력이다.
• 해설
앞서 ‘결의(決意)’에 대해 언급했다. 틸리히는 바로 이 결의(마음을 굳게 먹음, 결심, 결심하는 의지)를 위해 필요한 게 ‘용기’라는 것이다. 이른바 틸리히의 책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제시한 것이다. ‘to be or not to be’(사느냐 죽느냐)에서 ‘사느냐(to be)’에 필요한 게 ‘용기’란 뜻이다. 그런데 위의 문단 내 문장 연결은 비약적이다.‘~힘이 용기라고 하였다.’라고 하더니,‘우리존재 내에~’로 이어진다. 같은 문단인데 연결점을 찾기 어렵다. ‘~용기라고 하였다.’ 다음에 합당한 문장이라면, ‘인간이라면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죽음을 직면하기 위해 필요한 무엇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용기다.’라고 하던가, ‘삶의 우연성과 예측불가능성은 우리에게 허무와 무의미 그리고 불안감을 준다. 그리고 이를 직면하고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이다.’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본문(270~271p)
진실적인 존재로 있다는 것은 우리를 정의하고 긍정하는 데 필수적인 어떤 것이든지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은 진실적 실존 속에서 언젠가 일어나게 될 비존재의 가능성에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되고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 해설
마치 박근혜식 우주기운화법이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대뜸 등장하는 ‘진실적인 존재’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적 존재’란 ‘실존적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존재를 말한다. 내 실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의 순간을 포착하여 ‘실존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질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실존의 모습으로 ‘나’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바로 ‘진실적인 존재’이다. 수많은 셀럽(셀러브리티, 유명인)들의 극단적인 자살을 예로 들 수 있다.
대중의 환호 속에 존재하는 무대 위의 모습과 반겨주는 이 없는 빈 집에 돌아와 고독함에 직면한 이중적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기란 쉽지 않다. 인기가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대중에게 잊혀질까봐 두려워하는 것도 진실된 모습은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위선’이다. 언젠가 대중에게 잊혀진다는 불변의 진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매순간 실존적 진실을 움켜쥐고 살 수가 있다. 백인들 사회에서 유일한 흑인으로 살던 사람이 세수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는 말이 있다. 거울을 보고 세수할 때만 자신이 흑인이란 사실을 비로소 깨닫기 때문인 것이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깨닫듯이, 실존적 진실을 받아들이고 비존재(인간의 유한성, 죽음)의 가능성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말이다.
본문(271p)
킨(Keen, 1970)은 “진실적 존재는 불안에서 태어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의 불안은 우리가 옳은 선택을 했는지 또 행위에의 용기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불안이다.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인지적 모호성의 조건 아래서 어떤 가치나 다른 가치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통제를 갖는 것이고, 타당하게 자기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 해설
여기서 킨(Ernest Keen, 1970)의 코멘트는 그가 1970년에 발간한 책『Three Faces of Being: Toward an Existential Clinical Psychology』에서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말로는 『실존주의 임상심리학 개론- 살면서 부딪치는 세 가지 실존(적 양상)』이라고 옮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킨(Keen)의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의 쓰임새를 알아야 한다. 제목으로 보아, 이 책은 임상심리치료를 위한 실용서적이다. 다시 말해서 상담치료 장면에서 활용하는 지침서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서의 불안은 우리가 옳은 선택을 했는지 또 행위에의 용기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불안이다.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내담자와 상담하는 현장을 상상하면서 읽으면 이해되는 대목이다. 상담실에서 내담자가 보이는 불안은 선택의 불안이고, 그것은 사르트르의 말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란 말과 맞닿아 있다. 즉 불안하지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 바로 실존이다.
본문(271p)
우리가 진실적 실존에 이를 때, 우리는 계속적으로 우리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진실적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을 또한 수반한다. 비진실성에 관련된 개념이 죄책감이다. 실존적 죄책감은 불완전감과 우리의 완전한 잠재력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온다. 궁극적으로 존재의 자각에 대한 상실은 심리적인 병이 된다.
• 해설
우리의 한계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 즉 유한성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계속 중언부언하는 거다.
무대에서 환호받는 ‘나’의 모습과 텅빈 집에서 고독한 ‘나’의 모습이 다를 때 심리적으로 괴롭다. 내 머리 속에 존재하는 ‘나’란 사람의 모습은 1년 365일 24시간 내내 무대에서 환호 받는 이 세상 최고의 셀럽이다. 그런 멋쟁이는 ‘나’말고 이 세상에는 또 없다. 너무 멋진 ‘나.’ 그런데 집에 오면 아무도 없다. 적막하고 고독하기 그지없다. 그 때 실존적 불안이 생겨난다. 그 때 포기해야 한다. 무대 위의 나와 실존의 나는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에 외면하고 도피하려고 하지만, 그 때마다 불안해진다. 위선이 쌓여가지만, 적어도 셋은 이게 위선이란 걸 안다. 즉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 그렇게 쌓여가는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면 죄책감이 생겨난다. 불안과 죄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걸 실존적 죄책감이라고 말한다. 정상적인 윤리의식(교통신호를 위반한 경우)에 따른 정상적 죄책감과 예민한 신경과민의 환자가 느끼는 신경증적 죄책감(자주 손 씻는 결벽증환자가 가질 수 있는 것, 미리 두려워하는 것, 선생님에게 혼나지도 않았는데, 내면화한 나쁜 규율로 인해 처벌불안의 감정을 갖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실존적 죄책감은 불일치와 불완전한 감정에서 비롯된다. 이를 두고 ‘영혼을 흔드는 존재의 찜찜함’이라고도 말하는 이도 있다. 한마디로 실존과 관련된 부정적 감정이다. 한 달 동안 게으르고 성의 없이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뭔가 찝찝하고 찜찜하다. 원고청탁의 마감이 다가오면 불안하듯, 지금 당장 뭔가를 시작해야 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마감(유한성)은 다가오고 마음은 불안하다. 선택을 해야 한다. 전화를 걸어서 마감연장을 요청하거나 당장 원고지를 완성해야 한다. 유한성으로부터 요구되는 용기 있는 선택이 필요하다. 용기가 없으면 불안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런 게 실존적 불안이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낼 때 실존적 죄책감은 해소된다. 그 반대는 마음의 병이 생긴다. 실존적 죄책감이란 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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