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책 『인권』을 읽고 정리한 노트필기를 기반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근대 시민권 제도의 발전
근대 이전의 시민권과 시민권 제도의 탄생 배경
국민국가와 시민권 제도의 등장(근대 국민국가와 민족주의, 프랑스 혁명과 시민권 제도)
국민국가와 시민권제도의 확장, 국제기구 - 시민권 확장을 위한 노력
기원전 753년 시작된 로마는 왕정체제로 244년간 7명의 왕이 다스렸으며, 이후 450년간(기원전 509 ~기원전 27) 귀족들이 주도하는 로마 공화정 체제를 유지했다. 그리고 기원전 27년부터 시작된 황제 지배체제의 로마 제국은 420여년간의 세월이 흘러 동·서 로마의 분할(395), 서로마 제국 멸망(476), 동로마 제국 멸망(1453)으로 이어진다.
이 중 유럽의 근대 이전의 시민권은 5세기 중반 서로마제국의 붕괴와 함께 공백기를 갖는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시민참여 운영의 정치공동체가 소멸되었다는 뜻이고, 이 시절의 사회분위기는 개인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것이 5세기 초에 쓰여진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도덕적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허용하면서도 일체의 삶이 예정된 경로를 따라 가는 영적 사건의 연속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세속적인 삶이란 내적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집필한 직접적 동기는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시 약탈(Sack of Rome) 때문이었다. 비록 당시 서로마제국의 수도는 402년 이후 라벤나로 옮겨진 상태였고, 395년 이후 동로마 제국의 중심은 콘스탄티노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동·서 로마를 통틀어서 가장 상징적인 도시였다. 당시 베들레헴에 머물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세계의 빛이 꺼졌다. ... 로마시의 멸망은 결국 전 인류의 멸망이다.
이러한 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정신적 길을 제시할 필요성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적인 재앙이나 악(惡)은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하느님의 의지에서 생긴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즉 로마의 함락은 서고트족의 침략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역사적 심판이라고 보았다. 세계 만물은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발전과정이며, 역사는 단순한 사실이 연속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마련하신 예정된 경로를 인간의 의지로 따라 걷는 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 앞에 놓인 역사적 현실 앞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역사 속의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지만, 세계 만물은 일체가 예정된 영적 경로를 향해 가면서 두 개의 나라의 대립을 통해 발전해간다고 보았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중세를 관통하면서 17세기 계몽주의 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교회의 사상이 정치공동체의 사상을 대표하면서 시민권 제도의 발전적 가치는 현실에서 소멸되고 있었다. 5세기 중반 서로마의 붕괴는 서양의 중세시대를 여는 결정적 사건이었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서양 중세시대를 떠받치는 핵심적 사상이었다.
중세(中世, Medium aevum)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4세기-6세기)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14세기-16세기)와 더불어 근세(1500년-1800년)가 시작되기까지의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이나 이 개념은 동양사에는 적용하기 어렵고 유럽 이외 지역에 '중세'가 있었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상충하지만 유럽 이외 지역에 '중세'가 없었다는 지극히 유럽 중심주의적인 의견도 존재한다. - 위키백과
7백 여년의 세월이 흘러 12세기~13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테치아 등에 도시공화국 성격의 공화정이 다시 등장한다. 이를 두고 막스 베버(Max Weber)는 "성곽과 시장의 융합"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들 도시 공화정 국가들은 자유와 권리, 참여를 중시하는 시민권제도를 형성하면서, 근대적 시민권 제도를 등장시키는 토대로 작동했다. 다만 르네상스(14~16세기)와 근세(16~18세기)가 시작되기까지 유럽은 여전히 중세의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몇 백년이 앞선 12세기~13세기에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등장한 공화정 체제는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11세기는 봉건제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이탈리아의 피렌체, 피사, 제노를 비롯하여 베네치아에 이르기까지, 교황 권력과 황제 권력 사이의 공백 속에서 도시들이 이미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12세기와 13세기에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도시공화국이 성장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십자군 전쟁의 영향이자 결과였다. 십자군 전쟁(1096~1270) 당시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동서무역의 중심지로 급 성장했고, 그 상업로를 따라 독일, 플랑드르, 상파뉴 등의 유럽 내륙 지역들도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원정은 그러한 변화의 크기를 확장시켜주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 봉건 제후(군주)와 기사들은 전쟁터에서 죽어버리거나 재정적 파산에 이르는 반면, 왕권은 강력한 권력을 얻어가면서 점차 중앙집권화된 근대국가로의 변모를 시작했다. 봉건 제후와 기사들의 추락은 교황 권위의 추락과 함께 근대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유럽은 14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러 점차 중앙집권화되어 근대국가로의 변모를 시작했으며, 근대 시민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대로 전환하고 있었다.
시민권 제도의 탄생 조짐
시민이란 도시거주자(citizen, burgher, bourgeos)를 말한다. 또는 성(城) 안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특히 프랑스말 bourgeoisie(부르주아지)는 '성(城, bourg) 안에 사는 사람이란 뜻인데, 이후 마르크스(1818~ 1883)는 부르주아지를 재산이 있는 시민 즉, 유산시민(有産市民), 또는 자본가 계급으로 개념 규정했고 무산자(無産者)를 프롤레타리아라고 규정했다.
이처럼 시민이란 도시에 사는 재산이 있는 사람을 뜻했고, 이들 부르주아 계급이 국가의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에 해당되었다. 이로부터 시작되어 한 나라의 주권을 가진 주체적 인간이며, 근대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이 탄새했다. 즉 이러한 근대적 시민권은 도시에서 발생한 개념이다.
1096∼1270, 십자군 전쟁 | 귀족과 교황권 몰락, 봉건 제도 약화
1215 영국, 대헌장 제정 | 왕으로부터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
15세기 말, 상업 혁명 | 경제력과 규모가 커진 시민 계급이 발언권 획득중
1309∼1377, 아비뇽 유수 | 교황의 세속적 지배력 쇠퇴
1402 장 제르송《영혼을 가진 생명체의 삶》자연법에 ‘정당한 자유’라는 의미 부여
1517,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 단독자로서 자율적 인간’이라는 근대적 인간상 형성
1601, 영국 [구빈법] 제정 | 노인, 어린이, 장애인, 환자 등 빈민 지원(인권 침해 악용)
1610, 수아레스《법률론》출간 | 자연법을 인간의 권리로 새롭게 정의
1625, 그로티우스《전쟁과 평화의 법》출간 | 근대와 유사한 형태의 자연권 개념 주장
1628, 영국 [권리 청원] 제출 | 찰스 1세를 상대로 국민의 권리를 선언
1642∼1649, 영국, [청교도 혁명] 일시적으로 군주 정치가 무너지고 공화 정치가 시행
1651, 홉스,《리바이어던》 출간 | 자연법과 자연권을 구분하고 새롭게 규정
1688, 영국, 명예혁명 | 피를 흘리지 않고 전제 왕정을 입헌 군주제로 바꾸다
1689, 영국, 권리 장전 발표 | 왕권을 제한해 시민에게 권리를 부여
1689∼1755, 몽테스키외 | 삼권 분립 사상으로 국가 권력 남용을 방지
1690, 로크《인간 오성론》자연권은 자연법을 전제(생명권, 자유권, 재산권 구분)
1694∼1778, 볼테르 | 자의적 공권력 사용의 제한을 주장
1762, 루소,《사회 계약론》사회 계약론과 일반 의지 개념으로 정치 질서와 국가 설명
1775∼1783, 미국, 독립 전쟁 | 국가가 세워져 시민의 권리가 보장받다
1789, 프랑스 혁명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발표
인권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 프랑스 공화국 시민 또는 프랑스 거주자의 인권 보장1792, 프랑스 혁명 초기| 토머스 페인과 클로츠 같은 혁명가들에게 명예 시민권 부여
근대 시민권은 근대 도시에서 성장한 자본계 계급의 등장과 함께 역사적 사건들을 정점으로 발전해 나갔다. 유럽의 중세적 관점에서 인권에 앞선 것은 신권(神權)이었다. 인간은 절대자인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며 신이 내려준 고정 불변의 질서 속에서 신의 부르심에 따른 소명의 길을 걷는 피동적 존재였다. 다만, 절대자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으며, 가톨릭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적 의지를 실천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는 이러한 중세 봉건시대의 위계적 사회구조를 붕괴시켰다. 즉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평등하고 보편적인 개념을 배경으로 하는 수평적 인간관계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자연법과 자연권을 구분하고 사회 계약에 따른 국가의 탄생을 주장한 홉스, 로크, 루소 등의 사상이 대표적이고, 이들의 사상은 미국 독립전쟁이나 프랑스 혁명 등으로 현실화되었다. 즉 인권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유럽의 역사에서 근대의 시민권 개념 형성을 통해 발전하며 이뤄진 결과물인 것이다.
2020년 5월 2일(토) 오후 3시 40분, 안방 서재
키워드: 시민권, 아우구스티누스, 부르주아, 사회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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