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1일(토) 저녁 8시, 천주교 대전교구 전민동 성당 2층 성전에서 사순 특강이 열렸습니다. 방경석 알로이시오 주임신부님은 지난 2월 7일(토) 열린 세월호 참사 유가족 이호진 프란치스코 형제님 초청 특강에 이어서 올해 2번째 특강이라고 말씀을 여시면서, 이번에 초청된 분은 대학 후배 신부님이고, 토마스 그룸의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를 번역한 학자 신부님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어서 조영관 에릭 신부님의 특강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신앙 교육의 새로운 비전 (504쪽)
토마스 H.그룸 (지은이) | 김경이 | 임숙희 | 조영관 (옮긴이)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 2014-12-15 | 원제 Will There Be Faith?: A New Vision for Educating and Growing Disciples (2011년) | 정가 22,000원
강의에 앞서서 조영관 에릭신부님의 자기 소개
저는 1998년 서품을 받았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고 본당 보좌신부로 사제생활을 시작했고, 동성 중고교에서 중학 3년 고교 3년, 6년 동안 교목신부로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가서, 가톨릭 교육학을 6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본당에서 6개월 사목을 한 뒤 정진석 추기경님 비서로 10개월, 그리고 이제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 사제생활 17년은 주로 교육과 관련된 일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청소년 교육에 대한 관심과 가톨릭의 학교교육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런 책 (토마스 그룸)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를 만나고 번역했습니다. 이 책으로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인데, 이것은 신앙 교육에 대한 내용입니다.
첫번째.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당연한 게 아닌가?”, “글쎄, 나랑 아무 상관없는데?”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시지는 않으셨나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당연히 지속되는 건 아닌가?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오시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고, 신앙 지속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저자인 토마스 그룸(Thomas H. Groome). 이 분은 실천신학자이자 종교교육학자입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30여년이 넘도록 종교교육 관련 강의와 책도 여러 권 썼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위기시대인 이 시대에 어떻게 신앙을 우리 후손들이게 전달해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서 탈피해야 하고, 지금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신앙교육을 해야 하고, 지금 사람들의 느낌에 호소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면서 이 책을 쓰신 것입니다.
책의 제목은 어디서 비롯되었나
이 책의 제목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는 루카복음 18장 8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루카 18,1~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예수님께서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 있는데, 과부가 가서 올바른 재판을 청하는데, 불의한 재판관은 귀찮아하다가, 하도 졸라대니까 올바른 판결을 내려줘야지 하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루카 18,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래서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하면서, 정말 믿음이, 신앙이 시대를 넘어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오실 때까지 계속 지속될 수 있을지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보면 신앙의 위기 시대라고 합니다. 사회문화적 상황이 종교에 호의적이지 않는 상황인 것입니다.
무신론적 풍조 ... 종교가 더 부정적이다
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 이한음 (옮긴이) | 김영사 | 2007-07-20 | 원제 The God Delusion (2006년)
정가 25,000원 | 양장본 | 604쪽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쓰는 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런 책을 읽고, 종교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만들어진 신>은 2006년 나와서, 영어로 150만권 팔렸고, 31개국에서 번역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창조주 하느님을 부인하고, 초자연적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 성차별, 동성애혐오, 환경파괴 등에 사회적 문제에 종교가 더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누려야 할 감각적 쾌락을 종교가 억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요. 그런 무신론적 문화와 더불어서 세속주의가 있습니다.
세속주의의 문제 ... 하느님은 주일 성당에만 계신다
세속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는 물질만능주의와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입니다. 세속주의는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세속주의자의 하느님은 주일 성당에만 계시면 됩니다. 인간은 인간의 힘만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세속주의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것에 빠져있고, 신앙인들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주일에만 성당을 찾고, 자신의 인간적 행복을 찾아서 돈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10억을 주면 감옥에서 1년간 있겠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설문을 예로 들어보면, “10억을 주면 양심을 저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인 답변자의 50%가 그럴 수 있다고 했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을 했는데, “10억을 주면, 1년 정도 감옥에 살 수 있는가?”에 44%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현 시대의 신앙 위기 ... 모든 게 줄고 있다
서구 지역에서는 신자의 숫자가 급감하면서 문을 닫는 성당들이 식당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그것이 몸으로 체감될 정도이다. 아우구스티노 시대의 북아프리카에는 규모가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었지만 그것은 현재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원 후 5세기의 큰 공동체였습니다. 지금도 아일랜드의 주일미사 참석율이 80%에서 심지어는 10% 밖에 안되는 지역도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몇 달안에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다고 합니다. 제가 있던 보스턴에서도 성당을 통폐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아직 괜찮아 보이지만, 주로 어르신들만 보이십니다. 성당 특강을 듣는 분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신학생도 그렇습니다. 성소가 줄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신념으로 성소의 꿈을 가진 학생들이 줄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주 좋은 성적이 나와서 다른 세속적 기회가 생길 때, 그 유혹을 끊지 못하고, 다른 최상위권 대학으로 진학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1일자 7면에 보고된 내용으로, 한국 갤럽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보고서 1984~2014>가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의 40%가 매주 성당에 가지 않고 있으며,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77%에서 48%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신앙적 위기감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까?
첫 번째 해결책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우리의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잠재의식 속에서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니까, 그건 ‘내 일은 아니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계속 이뤄지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앞선 루카복음(18,1~8)에서처럼, 이 세상에서 신앙이 지속될 것인지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던진 질문인 겁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부분이 있지만, 우리가 할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런 것을 깨닫지 않는다면, 그것을 바로 값싼 은총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노력은 별로 안하고 하느님께 청원만 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어느 때에 오는가?’입니다. 우리가 하는 노력에 얹혀서 오는 겁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얹혀서 오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값싼 은총에 취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새로운 접근과 관심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신앙교육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다음세대에 대한 신앙교육입니다. 그 역할이 우리 교회는 물론이고 개인에게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신앙교육을 본당 신부님이 하시고, 보좌신부님이 하시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삶에 영향을 미치고 호소력이 있는 교육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의 신앙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지속성에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관심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 마음 속의 빈 공간
세 번째는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러니까 영적이고 종교적인 내적특성에서 보았을 때, ‘신앙의 지속에 대해서’ 우리는 긍정적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스칼이 한 말은 그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느님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하느님의 빈 공간이 존재한다.
우린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제 사제 성소의 계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던가, 아니면 고2에서 고3에 올라갈 즈음이었나, 저는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는 중에 하나도 맘을 끄는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좋아하는 여학생과 “결혼하고 살면 행복하게 살까?”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참 이상적이었어요. 행복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허한 것이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빈 공간이 하느님을 생각하면 싹 메꾸어졌습니다.
자녀가 복사 설 때 생겨나는 회심과 기쁨
어떤 신자분들께서는 자신이 신앙적으로 다시 회심할 계기가 언제냐고 물었을 때, 아이들이 첫영성체를 받고 복사 설 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침에 못 일어나던 아이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벽녘에 일어나 복사 서는 모습과 그 진지한 모습에서 회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말로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사명도 바로 모든 이에게 가르쳐서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신앙교육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신앙교육은 누구와 관련되어지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사들은 항상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배우는 사람도 항상 교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파울로 프레이리는 “모든 학습자는 서로에게 배울 수 있으며, 언제나 그들의 교사들을 충분히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교리교육 총지침 220항>을 보면, ‘교리교육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며,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특별한 책임에서 오는 교육 활동이다.’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 * 파울로 브레이리(1921~1997) 브라질의 교육학자
난 아는 게 없어서 ...
그런데 우리는 너무 소극적입니다. “제가 아는 게 없어서.” 하지만, 아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신앙교육은 누가 하는가? 누가 합니까? 우리 모두입니다. 여러분이 다 하셔야 합니다. 물론 특별한 책임을 가진 분들은 당연히 사목자들입니다.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되겠지요. 그리고 둘째는 자녀를 둔 부모님입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은 자녀의 첫째가는 주요 교육자입니다. <교리교육 총지침 178항>에 보면, ‘가정교리교육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657항에도 비슷한 말이 있고요.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번째는 사목자, 두번째는 부모) 그리고 세 번째는 교리교사입니다. 이 분들은 특별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교리교육 총지침 221항>은 교리교사에게 특별한 소명을 부여합니다. 특히 221항에서는 공동체가 교리교사를 양성해야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교육도 평생 이뤄지는 것
그러면 신앙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우리 모두입니다. 모든 사람, 그리고 전 세계에 걸쳐. 사회적으로 ‘평생교육’이란 말을 합니다. 신앙교육에서도 ‘평생신앙교육’이 있습니다. 과거에 신앙교육은 예비자 교리하거나 아이들은 첫영성체를 합니다. 그 다음은 견진교리입니다. 그러면 대부를 서죠. 그러면 끝! 견진성사를 받으면, 어른이 된 것이니까 교육을 다 받은 것이고, 이제는 가르치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다가 개념이 바뀐 겁니다. 평생 이뤄져야하는구나!
유치원생, 초 중고등학생, 청년,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가 교육대상입니다. 이제 신자분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성서 백주간 같은 게 있고, 특강 행사가 있죠. 서울 교구에서는 10주 프로그램의 신앙강좌를 성당에서 열기도 합니다. 그런 게 평생교육입니다. 이 교육에서 사제 수도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육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모든 신앙인들, 신앙공동체에서 모두가 교사이며 학습자가 되는 것이다. 신앙이 지속될 것인가의 여부는 누구에게만 달려 있는게 아니라, 모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모두가 책임을 지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신앙은 무엇이고 왜 가르쳐야 하는가?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간직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신앙교육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생각해보셨나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
가톨릭 신앙이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이 진정하게 성립하려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만으로도 안 되고, 인간만으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불러도 내가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 신앙을 가질게.” 하면 성립이 안 됩니다. 서로 눈을 맞추고 있어야 합니다. 눈 맞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전임 교황님께서는 2012년 성탄 메시지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자기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안에 하느님께 내어드릴 공간이 없습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느님을 향해야 하고 바라보고 희망하고 살려고 노력하는 내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제 발로 성당을 찾아왔는데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 이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은 주도권은 하느님이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부르시고 인간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어떤 분은 “아닌데요? 제가 제 발로 걸어서 먼저 성당 찾아왔는데요?” 하는데, 아닙니다. 여러분 영혼 안에서 하느님이 계속 두드리고 계셨고, 그것에 응답한 것입니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신앙적 기초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인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게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주도권을 드린다고 하지만, 내가 주도권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판기 신앙인
대표적인 사례가 자판기 신앙인입니다. 자판기에 돈 얼마 넣죠? 300원 넣고 밀크커피 누르면 나오죠? 안 나오면 고장난거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백일 기도 했습니다. 정말 헌신적으로 했어요. 그럼 하느님께서 당연히 들어주셔야죠? 안 들어주시면 문제 있는 거죠? 그렇죠? 그렇게 우리가 생각할 때 주도권은 누가 갖고 있죠? 내가 열심히 성당에 나오고, 열심히 봉사를 하는데, “하느님은 왜 제 기도를 안 들어주세요?” 그것은 내가 하는 것에 따라서 하느님이 움직여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판기 신앙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잘 보면,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필요할 때 주시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묵상해 보면, “너에게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라고 약속한 게 아브라함 75세였고, 자식을 준 것은 25년이나 기다린 100살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는 자식을 하느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재물을 구해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더 잘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우린 그러한 믿음이 없습니다. 성모마리아의 신앙고백은 또 어떻습니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면, 그저 우리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란 것입니다.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가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 묻죠.
가장 큰 계명
가장 큰 계명 (루카 10,25-28, 참조. 마태 22,34-40 ; 마르 12,28-34)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네 정신을 다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해서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적극적 응답에는 본질적으로 세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신적으로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행동으로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3H (Head, Heart, Hand) faith
그래서 세가지 중요한 측면을 지성과 마음과 실천, 즉 3 H(Head, Heart, Hand) faith 라고 합니다.
(1) 지성의 동의(同意)로서의 믿음(Head faith)
이 중에서 첫 번째는 지성의 동의(同意)로서의 믿음(head faith)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믿습니다. 예비자교리를 보통 6개월 하죠. 그런데 그렇게 긴 시간이 과연 필요한가를 생각했을 때, 우리가 진정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이성의 작용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성의 동의입니다. 그래서 지성의 동의는 지식을 아는 차원이 아니라 지혜로 승화되어 믿음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중요한 부분은 두 가지인데, ① 하느님말씀인 성경과 ② 거룩한 전승인 교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합니다. 신앙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성경과 교회의 전승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 충실히 이러한 배움이 필요합니다.
(2) 하느님과의 내적 친밀함(Heart faith)
두 번째는 하느님과의 내적 친밀함(Heart faith)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아는 것과 느끼는 건 아주 다릅니다. 신학생 중에도 많이 배워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만, 그 사랑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에 하느님 생각을 매순간 마다 하시나요? 사랑한다면 매일같이 하느님이 생각나는 겁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생각나지도 않는 거죠. 전 매일 생각나요. 그런데 “왜 생각이 안 나지?”한다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다시 정리 하면, 하느님을 믿으며 교회 가르침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성을 넘어서 신뢰하는 겁니다.
뼈저리게 느끼면 받아들인다
우리는 미사 중간에 ‘신앙의 신비’를 찬미합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 몸과 피가 바뀌게 됩니다. 빵과 포도주가 바뀝니다.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동정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 또한 그러한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 받아들이게 됩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나의 자리를 가장 밑의 자리로 내려놓게 됩니다. 그래서 개를 정말 사랑한다면 개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다
하느님이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왜 전능하신 분이 나약하게 인간의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것을 사랑이 없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키워가는 두 가지 중에서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사랑을 키워가라는 겁니다.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죠. 하느님을 생각하고 내 마음을 드리는 것. 바로 그것이 내적 친밀감입니다. ‘기도해야 한다’고 했을 때, 단순히 기도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받아들이는 것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중요하죠! 그래서 미사가 중요합니다. 냉담의 가장 빠른 길은 주일미사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격주로 오다가 다시 한 달에 한 번 오다가는 이윽고 냉담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시작하기 위해 평일 미사에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체험하는 게 중요합니다.
(3) 실천(Hand faith)
세 번째 중요한 게 실천(hand faith)입니다. 가톨릭은 실천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야고보서에도 ‘실천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야고보 2,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실천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천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교회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한 실천입니다, 교회의 복음 선교 사명에 참여하면서 신앙을 증거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실천입니다. 십계명과 진복팔단에 바탕을 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삶을 사랑하는 것도 실천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실천입니다. 그리고 정의와 평화에 참여하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 다 실천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하느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관계적 교류와 눈 맞춤과 적극적 응답인 것입니다.
3가지가 내면화된 통합적 신앙을
그래서 세 가지를 다 잘해야 합니다. 정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당활동도 하시고, 기도도 하시고, 공부도 할 때 조화로운 신앙생활이 되고, 내면화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몸에 신앙이 배는 것이죠. 내가 들은 것을 마음으로도 느끼고 실천이 되는 것.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일치되는 것. ‘신앙 따로, 삶 따로’가 아니고 하나가 되어서 움직이는 게 내면화된 통합적 신앙입니다. 그렇게 통합적 삶을 살게 되면 아가페적인 삶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순간들에서 희생하려고 하고, 다른 이와 화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열매, 하느님의 열매를 얻는 겁니다.
신앙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
신앙교육은 신앙적 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지식을 가르치려면 많이 알아야 하겠죠. 그러나 신앙이란 종합적인 것이기에 다른 측면에서도 신앙 정체성을 가르치고, 신앙을 쇄신시킬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교육은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3H 신앙은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신앙교육을 통해서 정말 우리의 자녀가 신앙교육으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충만한 사람,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 자비와 연민이 가득한 사람, 개방적이고 남을 환대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네번째. 예수님의 신앙교육방식은 어떠했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 상당히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릴 걸 얘기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을 위한 하느님 뜻이 현실에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토마스 사도는 모든 사람과 모든 창조물을 위한 생명의 충만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의 충만함이 필요한 시대
지금 시대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그것은 하느님께서 부어주신 기운입니다.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것은 생명의 빵입니다. 생명이 충만한 하느님 나라, 지금 여기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시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예수님의 신앙교육 방식
일단 신앙교육을 할 때 하느님은 사람들의 삶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의 삶을 현실에서 바라보도록 시작하셨고, 그 현실의 삶을 먼저 성찰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기존의 관습적인 것도 새로운 관점에서 쳐다보게 하셨고,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이 스스로 깨닫고 인식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것은 주입식이 아닙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한 신앙의 진실을 삶에서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는길 ... 제자들은 왜 못알아봤을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나그네로 다가가시어 무슨 이야기 나누는가 물어보았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의 저자 토마스 그룸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볼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얘기해주시지도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스스로 알아차리길 원한 겁니다.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도록 한 겁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묻죠. “아니, 예루살렘에서 있던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하면서 대화의 테이블 위에 그들의 슬픔과 낙담 등 여러가지를 꺼내놓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구약의 여러 진리들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스스로의 삶을 바라보게 하고 성찰하게 한 다음 신앙의 진리로 이끌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머물러 달라고 하니까, 함께 저녁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 때 빵을 쪼개어 나눠주자 제자들 눈이 열립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보도록 계속 안내만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알았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사라지셨습니다. 여기서 토마스 그룸은 말합니다. “훌륭한 교사는 역할을 다하면 떠나는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또 다른 제자들에게 갔을 거란 거죠. 그렇게 또 만나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길이란 늘 엠마로를 향해 길을 가는 겁니다. 그 길에서 우리와 함께 걸으며 들어주시고 성찰을 하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도 그런 자리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은 오직 여러분의 몫입니다.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죠. 이제 실천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다른 아들을 만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삶에서 신앙으로, 다시 삶으로
한마디로 예수님의 교육방식은 삶에서 시작해서 신앙의 진리로 나아가서, 신앙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하고 그것으로 다시 삶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줄여서 말하면, ‘삶에서 신앙으로 다시 삶으로’... 예수님의 교육방식이 이런 것입니다. 토마스 그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서 시작해서 신앙으로 가서 다시 삶으로 가는 것이 신앙교육입니다.
삼위일체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일치 안에서 완전한 내어줌이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모든 권한을 다 주셨고, 성자는 성부에게 순종하면서, 성령을 통해 활동하셨으며, 성령은 한 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활동하고, 온전히 내 자신을 다 내주시면서, 다른 존재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안에서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 안에서 삶의 자리로 간 겁니다. 가정 안에서도 일치를 이루는 것은 내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를 이해하고 배우자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방식은 그들의 삶을 신앙으로 연결시키고, 이 신앙은 성당에서만 신앙이 아니고, 실제 삶에서도 신앙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신자’란 말이 있습니다. 성당에서는 열심이고, 성당에서는 봉사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만, 집에 오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형제님들 중에는 집에서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안되는 것이죠.
다섯째. 어떻게 신앙을 교육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지속적인 신앙교육을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 교육의 중요한 세 주체는 본당공동체, 가족, 그리고 가톨릭 학교입니다. 신앙교육은 어느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모두의 책임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최대한 많은 신자들에게 성당 안에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줘라
본당공동체에서의 신앙교육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전체공동체를 위한 신앙교육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교육은 특강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키워줄 수 있는 모든 방식이 다 신앙교육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교육하는 사명에 모두가 교육자인 동시에 참가자로서 모든 본당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영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신앙을 실천하게 하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미사 후 발걸음을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신자들 혹은 최대한 많은 신자들에게 성당 안에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하게끔 해야 합니다.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관심사에 따라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단지 신앙행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인정받고 지지받는 느낌이 드는 장소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고인다.
두 번째는 증거의 공동체로서의 본당이 가진 역할입니다. 우리는 사실 신앙을 증거하는 일에 약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증거하는 게 매우 중요하죠. 우리는 가정과 일터에서 이웃과 만나면서 신앙을 나눌 기회를 갖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건, 신앙이 어떻게 성숙해지고 견고해지는가를 보았을 때, 신앙을 나눌 때 더욱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나눌 때 더 견고해집니다. 나누지 않으면 고여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주위 분들에게 내 신앙을 한번 증거해 보세요. 가르치려는 게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세요. 그러면 견고해질 겁니다.
세 번째는 전례공동체로서의 본당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래서 미사 자체가 신앙교육이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을 얻게 되고, 특히 성가에 담긴 좋은 가사와 음은 사람의 마음을 들어 올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노래하는 것은 두배로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노래할 때 마음을 담아서 하면, 두 배의 기도가 되는 겁니다.
네번째 봉사의 공동체로서의 본당 ... 본당 차원에서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실천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가톨릭 신앙에서는 불쌍한 이웃을 도와야한다, 봉사는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하 그거 안해도 되는가보다 라고 의식하며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당 차원에서도 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모습을 실천하고 보여주는 것이 신앙교육에서 중요하다는 겁니다.
다섯째 말씀/선포의 공동체로서의 본당 ... 성경공부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성경 공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말씀/가르침 공동체로서의 본당... 지성적인 신앙교육을 위해서 주기적이고 정기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치부, 초중등부, 청년부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죠. 교리교육과 나눔 등을 위한 다양한 방식을 개발하고 운영해야 하는 겁니다.
가정에 대해서
“종교는 가정에서 양육되지 않으면 결코 삶에 철저히 스며들지 않는다.”
호레이스 부시넬(Horace Bushnell, 1802~1876, 미국 신학자)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한다는 의미는 교실을 만들자는 게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신앙적인 분위기가 흐르게 하는 것, 가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느끼고 신앙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교리교육 총지침 255항을 보면, 가정도 교회라고 봅니다, <가정교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죠. 그래서 가정도 환영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가정구성원이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존중받고 편안해진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가장 힘든 이를 우선 돌봐야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교회의 정신인 것처럼, 가정 안에서도 가장 힘들고 도움이 필요로 한 이를 우선적으로 돌보는 게 중요합니다.
증거의 공동체로서의 가정
가정 안에서 어른들이 쓰는 말 중에는 생명을 살리고 키워주는 말들, 즉 용기를 주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이고 다정하며 상대방을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명을 앗아가는 말들도 있습니다. 편견과 차별적인 언어들, 발전과 성장을 좌절시키는 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말을 써야 합니다. 신앙적 가치가 드러나는 언어를 쓰자는 것이죠. 그리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 주일은 하느님 날이니 내 일보다 하느님이 우선입니다, 주일에 성당가고, 주일에 일에서 손을 떼고 편히 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전례의 공동체로서의 가정
또한 가정도 전례공동체가 됩니다. 전례공동체로서의 가정이죠. 가족이 함께 기도를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고, 가족만의 특별한 기도 혹은 신앙의식을 만들고, 신앙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종교적인 상징물들을 집 안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봉사하는 공동체로서의 가정
봉사하는 공동체로서의 가정. 가족회의를 할 때, 비록 아이라고 하더라도 가정공동관심사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신앙교육이고, 가족이 함께 자선을 실천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 공동체로서의 가정
말씀공동체로서의 가정... 가족이 함께 신앙을 나눌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도와 주실거야!” 이런 말도 도움이 됩니다. 아이에게. 일상의 삶과 대화에서도 하느님에 관한 말과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춘선 마리아 할머니는 아들 4형제가 신부가 되고 한 따님은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 분은 가정 안에서 신앙교육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이 할머니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은 신앙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일미사에 참여하게 했고, 영혼이 굶어주는데 육신이 배부른 건 아무 소용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없는 살림에도 성경과 교회서적 많이 사두고, 어떤 경우에도 정직하게 살고, 신앙을 실천하는 굳은 의지를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남는 건 사랑 밖에 없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할머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는 건 사랑 밖에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춘선 마리아 할머님의 관두껑에는 ‘사랑을 다 베풀고 가지 못함이 가장 가슴에 사무친다.’라는 유언이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신앙교육이고, 여러분이 하실 수 있는 가정교육입니다.
평화신문 2015.3.22> 춘천교구 오상철.상현.세호.세민 신부 모친 이춘선 할머니 선종 (향년 94세)
평화신문 2012.6.10> 네 아들신부에게 보내는 91살 어머니의 편지 "뜨겁게 사랑하는 사제 되세요"
여기서 본당이 도와줘야 할 것은 본당이 가정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사목적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본당 안에서 자녀들의 신앙을 효과적으로 양육하는 신자 가정들은 더욱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당과 가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학교에 대해서
학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들을 구현하가는 가톨릭의 교육기관으로 학생들의 학업성취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신앙적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학문의 배움과 신앙을 통합시키고, 배움의 지식 안에 복음적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기에, 학문과 신앙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교육을 잘 시키려면 세 가지가 잘 조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가정 신앙교육, 본당공동체 신앙교육, 학교에서 신앙교육. 이 세 가지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법 798조] 부모들을 가톨릭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자녀들이 학교 밖에서 합당한 가톨릭 교육을 받도록 힘써야 할 의무가 있다.
가톨릭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것은 가톨릭교회헌장에서도 ‘가톨릭 학교’에 대해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가톨릭 학교를 많이 세울 수가 없기 때문에, 기존 학교들에서 학생들의 자치활동 중에 신앙교육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
이런 말 있습니다. 조류는 밀물과 썰물이 있죠.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과 관련해서, 하느님 은총의 조류는 예외라는 말이 있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있는데,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밀물이다. 만조이기에, 항상 채워져 있다. 하느님의 은총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항상 우리 안에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죠. 우리는 신앙적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신앙이 지속되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들의 노력으로 신앙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끝)
2015년 3월 21일(토) 저녁 8시 전민동성당 사순 특강
조영관 에릭 신부님 (서울 가톨릭대학교 대신학교 사무처장 겸 교수)
이 기록은 정리자의 편집과 윤문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제 강연과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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