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2014-4-12 밤 9시 미사
제1독서. 사도행전 4,32-35 | 제2독서. 요한 1서 5,1-6 | 복음 요한 20,19-31
서로의 모습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비주일'이기를
오소서 성령님! (교중. 새로 나게 하소서)
부활 2주일의 4가지 주제
오늘 요한복음 말씀은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요한복음 20,19)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죠. 그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① 평화를 약속하시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 여드레 뒤에는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② 성경을 기록하게 된 목적과 ③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표징들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는 세가지 주제가 있고, 그 다음에 ④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은 네 가지 주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비의 사도 파우스티나
하느님의 자비주일은 2천년의 하느님 자비의 사도랄 수 있는 파우스티나 성녀를 부활 대축일 다음 주일에 성녀로서 선포하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 바로 그날을 하느님의 자비주일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해서 2001년부터 지내고 있습니다.
자애와 사랑을 다 포함하는 자비
그래서 저는 이 네가지 중 어떤 강론을 할까? 부활 2주일이 되면 매년 강론이 똑같아서 여러분이 다 알게 되면, 재미가 없어서 돌려가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비주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미사 중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자비에 대해 말하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평화를 주소서!"하기 전에 "자비"를 두번 얘기하죠. "하느님 자비"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화답송에서도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라고 찬송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자애와 사랑을 다 포함하는 '주님의 자비'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처럼
오늘 제1 독서는 사도행전(4,32-35) 말씀입니다. 초기의 그리스도 공동체 모습입니다. 초창기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얘기도 나오고 그렇습니다.
한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저는 "너무나 한마음이 되어서 기쁘게 살아가는" 초창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습을 바로 이 사도행전에서 볼 수가 있고, 순교자들의 기록에서도 그들이 얼마나 없던 시절에 콩 한쪽도 나눠먹는 심정으로 살았을까 하는 것을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바로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해요.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두가지 주문이 있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게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8)라는 구절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 운명공동체인가?
이렇게 두가지가 성경에서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 중에 많은 자비를 청하고 그러면서 내가 자비로운 사람인가를 생각해보면, 우린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가 받는 만큼 풍성한 자비의 마음을 갖고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사실 "저 자신부터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전민동 성당은 하나의 공동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얘기합니다.
시내버스 탑승객들도 공동체인가?
교회와 공동체 이것은 그냥 단순하게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죠. 시내 버스를 함께 타고 가다가 도 사고도 날 수가 있는데, 그렇게 보았을 때, 시내버스도 일종의 익명의 운명 공동체입니다. 사실상 하나의 운명 안에 있지만, 만일 우리가 전철 안에 빽빽한 사람들 틈 속에서 "여러분 우린 운명공동체입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그럴까요, 사실은 남남이죠, 그런데 교회는 남남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기때문에 공동체라고 부르고 교회라고 부릅니다.
기초적 공동체 가정교회
그래서 가정도 작은 교회이고 기초적 공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가정은 중요하다는 얘기죠. 그런데 그런 속에서 우리는 사실 마음에 많은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어떻게 하면 주님의 자리가 넘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본당이 공동체일까요? 우리 본당 공동체는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 안에는 안 계신 거 같아요. 그렇지만 여러분들 안에는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볼 때 주님을 모신 사람으로 보겠죠.
서로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작은 교회, 기초적 공동체로서의 가정, 그 가정에 예수님이 계신데, 여러분 안에 있어요? 아닌 거 같아요. 상대방이나 가족들 다른 가족들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 공동체 안에 분명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초창기 교회의 삶처럼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산다면, 서로의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자비로워질 수 있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멀리 계신 게 아니라, 공동체 안에 계시고, 마음 안에 계시고, 가정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눈으로 알아보고, 우리 삶의 중심으로 모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린 주님께서 자비로우심으로 우리도 자비로워질 수 있다고 봅니다. 잠시 묵상합니다.
방경석 알로이시오 주임신부님 말씀
이 글은 강론을 필자가 받아적으며 재구성한 것이기에 실제 말씀과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 내의 성경구절은 글의 구성을 위해 삽입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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