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隨處作主)

가는 곳마다 참된 주인이 되어라!

 

2012 9 13일 제654회 즉문즉설에서 드러난 정토회 법륜스님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

(즉문즉설 현장을 찾아온 개신교 신자 고교생의 질문에 대한 법륜 스님의 답변)


기독교인의 정의는 뭡니까?

 

기독교(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희생하심을 믿고,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본다면2천년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고,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나리듯 내리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이 성경에 있습니다


유다교와 달랐던 가르침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다고 본다면, 세상에 겁날 게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세상에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파하는 내용이 전통의 유다인 종교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 중 한가지 예를 들면, 유다교는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래서 구원은 유다인만 받을 수 있다는 것. 유다인이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선민, 선택된 민족이죠. 구원의 기준의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다른 민족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유다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이방인에 대한 포용


비유다인, 그러니까 이방인. 유다인들은 유다인이 아닌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도대체 너가 누군데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하느냐 이겁니다. 지금보면 상식적 이야기지만, 그 당시에 그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혹세무민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인도 구원받음을 보여준 선한 사마리아인


그 때 예수님께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중환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못하는 버려진 사람이 하나 있는데, 율법주의 학자나 바리사이 교도들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 환자를 보고 잘 돌보고, 또 볼 일 보고 와서 돌봤다는 것.” 이렇게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하느님이 보시기에 누가 더 좋아보이시냐. 그러니까 거기 있던 대중이 모두 사마리아인이요.” 이랬어요. 이게 바로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이고, 이것이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기준이 유다교는 민족인데, 예수님께서 인종적, 민족적으로 구원의 기준이 되는 게 아니라, 여기 작은 자 하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이것이 구원의 기준이라고 한 거죠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날


이것은 뒤에 가서 보면,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날 왕께서 오셔서 산자와 죽은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 떼와 이리 떼를 나누듯이 나누고, 너희들은 지옥에 갈지언정, 왜 우리가 지옥에 가야 합니까?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면회 안왔다 이겁니다


(① 마태오복음 25,32절에 따르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이리떼'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사소한 착각에 불과한 것이고, 법륜 스님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을 가져라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고, 우리가 언제 그렇지 하지 않았습니까? 하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게 구원의 기준이에요. 이게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겁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 이런 얘기는 없어요. 예수님의 말씀에는. 구약에는 있는지 몰라도. 그러면 그대로 적용하면, 여기 환자가 하나 있는데, 신부님이나 목사님은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스님이 지나가다 그를 돌보았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누가 좋겠는가?


그러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누가 좋아보이는가? 똑같이 적용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간다면, 구원이 교회 안에 있다, 이런 시스템 안에 있다는 것은 유다교적 논리이고, 그러면 기독교가 유다교 논리에 빠져있다. 마치 불교가 사람이 죽어서 소가 되고, 미련하면 소가 되고, 욕심많으면 돼지 되고, 사람이 되었다가, 소가 되었다가, 돼지가 되었다가, 이것은 힌두교 논리지 불교 논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인들은 그것이 마치 불교의 논리인 양 착각을 하고 있잖습니까?

 

십자가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본인이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십자가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 정신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자신을 십자가에 혹세무민한다고 매달았을 때, 그 분은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죄를 모르옵니다. 지금 우리가 흉내낼라고 해도 안되요. 즉 세상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육신을 매달고 죽일 수는 있어도, 그의 마음과 영혼에는 아무런 상처도 줄 수 없었다. 이게 부활입니다. 몸은 죽여도 마음을 죽일 수 없는, 몸뚱이 사흘만에 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핵심이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그러니 그걸 딴 종교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기독교 안에서도 세상을 향한 열린 자세를 찾을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 법륜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만족한 질문자인 개신교인 고교생은 금요예배를 갈지, 즉문즉설에 올 건지 고민하다고 왔다고 말하면서, 스님과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좌중을 웃음에 넘치게 만들었다.)

 

천하만물은 모두 창조주의 피조물


기독교 논리로 얘기해도 아무런 모순이 없어요. 이 세상 천하만물은 모두 창조주의 피조물이죠. 그럼 스님은 뭐다? 피조물이죠? 그러면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로 해서 역사를 해요. 자기 뜻을 관철시킨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스님을 통해서 역사를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맞는 이야기에요. 그러니 스님을 통해서도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성경 속에 이미 수행적 관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불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 담긴 수행적 관점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가 그 상황에서 우리가 주인이 되라.”

 

우린 이것을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하죠. 그런데 그것이 성경 말을 빌리면 뭡니까?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줘라.”입니다. “겉 옷을 달라고 하면, 속 옷까지 벗어서 줘라.” 이런 것이죠. 누군가 “5리를 가자!”라고 하면 끌려가는 거죠. 종속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10리 가줄 께!” 하면 그 상황에서 내가 주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그는 육신이 죽어도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마음이 따라 움직여서 괴로워하는데, 몸을 죽였는데도 그 영혼과 마음이 전혀 구애를 안 받았어요. “그들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냈잖아요


불교식 '해탈'이며 '열반'


그걸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 ‘열반이에요. 몸을 죽여도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잖아요. 그러니까 꼭 불교가 아니어도, 기독교 신자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면, “이 놈이!!!” 하다가,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나를 죽여도 그를 용서했는데, 바람 정도 폈다고 용서 못할 일이야? 신앙적으로 보면 그래요 안그래요? 그렇죠. 그런데 저 인간!!!” 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저 인간!!!”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크리스찬이라면 거기에 예수를 통해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새로운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다르잖아요. 보통 사람같으면, “저 사람 저것을!!!” 하겠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저렇게 했구나.” 그러면 전파력이 굉장히 생기죠.

 

다르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교다 기독교다, 불교 안의 무슨 종파다. 이런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똑같다는 게 아닙니다. 각각 거기에 묘미가 있고 맛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넘어서서 한단계 넘어서서 진리를 봐야 합니다. 원래 주님의 가르침도 그것을 넘어서서 보는 것을 가르쳤지, 종교적 울타리 안에서 폐쇄적으로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불교를 불교란 울타리 안에서 넣어서 바라보니까,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진리라는 상을 정해도 그것은 상이니까 진리가 아니다.'란 말이 있고, 노자도 말했잖아요.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그 너머의 세계를 봐야 한다


그래서 그 너머의 세계. 그것을 보고, 그 길을 가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겁니다문제는 이 깨달음의 길을 갈 것이냐, 그래서 해탈로 갈 것이냐, 아니면 어리석음을 움켜쥐고 중생의 길을 갈 것이냐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습관이 되어서, 잠시라도 한눈팔면 이 길에 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누구나 다 본래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有佛性)②,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겁니다. (열반경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 모든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다 해탈의 길이 열린다는 겁니다.


② 일체중생 개유불생과 일제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은 같은 뜻

 

2012913일 제654회 수처작주

정토회 법륜스님 즉문즉설에서 나타난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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