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생이다. 충남 솔뫼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만 15세이던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만 23세가 된 1844년에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만 24세에 상하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의 해로를 통한 선교사제의 입국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 체포되었고 여러차례 문초를 받아가 3개월여만에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만 25세의 일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게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2015년 7월 5일(주일) 오전 10:30 교중미사강론

한국성직자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순교자 대축일



신앙의 중심은 성당이 아니고 마을이며 공동체이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성인도 풍년이고 복자도 풍년이고, 순교자도 풍년이고 그렇죠. 물론 그 이상의 역사는 전하지 않더라도 배교자도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을 지내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차쿠의 아침>이라는 (성당에서 새로 시작하는) 신심서적 읽기 첫번째 서적으로 선정했던 역사를 근거로 한 소설이 있습니다. 



2014년 8월 4일, 바오로딸출판사가 출간한 <차쿠의 아침> (14,000원)의 주인공은 최양업 신부님이다. 이 소설은 1845년 7월 차쿠에서 사제수품을 앞둔 김대건 신부님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시작하여, 1849년 12월 최 신부님의 조선 입국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책소개 페이지 링크]


<차쿠의 아침>을 읽으면 김대건 신부님의 마음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 김대건 신부님 축일을 지내면서, 순교라는 것은 그 분이 영성적으로 더 깊어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야 당연히 신앙적으로 깊은 분이셨지만, 많은 순교자들의 내용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믿지 못하고 배교하는데 그 사람 혼자만 순교의 길을 간 것인가? 그럴 경우는 거의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믿음으로 흘러갈 때, 그 때에 순교도 가능해진다는 생각을 해봐요. 제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제가 살던 고향은 신앙촌이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살던 동네에 성당을 지으려고 했어요. 아주 열심하니까! 그런데 저쪽 동네에서 자기들이 양보할 수 없다고 해서 가운데에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당시 저희 동네에는 냉담자가 몇 명이었을까요? 그 때 냉담자라는 말 자체가 없었어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싸우잖아요! 


성질이 저 같은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맨날 술 이렇게 먹고서 이 개XX, 이 쌍시옷, 이러면서 남의 것을 발로 걷어차고 코피나고 이런 어르신들이 계셨어요. 당연히 신자들하고 싸웠겠죠. 그래서 다음 주에 누군가가 혹시라도 성당을 빠지면, 마을 전체가 그 집을 신앙적으로 걱정하고 기도하면서 집을 자주 방문하고 놀러가면서 '그러면 안된다!, 성당은 나와야지!' 하면 그 다음 주에는 성당에 다 나와요. 웃으면서. 그렇게 신앙공동체 안에서 냉담자가 없었어요. 


그렇게 박해의 시절을 겪고, 순교의 시절을 겪으면서도 교회가 그 역사의 중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는 바로 신자들간의 끈끈한 우애와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성당이 아니고, 마을이고, 공동체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당에 와서는 그냥 말씀을 듣는 겁니다. 


제가 첫번째 본당생활을 했던 예산에서 했는데요. 이인하 (베네딕토) 신부님이 태어나신 예산의 수천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실제로 예산에는 '수천리'가 아니라 '수철리'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故) 이인하 신부님(1925년생 원로사제) 아시는 분들 계시죠?  수천리(수철리) 외에도, 예산에는 여러 동네가 있는데, '오천리'도 있고, '구만리'도 있습니다. (* 오천리는 현재 통폐합되어 없어졌고, '수철리'와 '구만리'는 현재도 있는 명칭)


어느날 나무꾼이 나무를 지고 주막에 와서, 빨리 밥을 달라고 하니까, 어디서 왔냐고 하니까 '오천리'에서 왔다고 하니까, '나는 수천리에서 왔네!' 하니까 또 어떤 이는 '구만리'에서 왔다고 하는 거에요. 여담이지만, 그게 멀다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서 가면 멀고 산 너머로 가면 가까운 그런 동네들입니다.(*실제로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서 예산군 예산읍 오천리까지는 20km 내외의 거리이다)


(이인하) 신부님이 어렸을 때, 예산 국민학교를 다닐 때 맨날 지각을 하니까, 선생님이 한번 "네 녀석은 도대체 집이 어디기에 맨날 지각하냐?"고 하면서 같이 갔다 오고 나서 지각해도 혼나지 않았다는 그런 동네입니다. (예산에서 사제생활을 하던) 그 때 제가 예산 분들하고 이야기하면서, 그 당시 (1925년생 이인화 신부님 시절을 말하는 듯) 성당들이 다 공소였어요. 성당에서 신부님이 강론을 하면 강론원고를 가지고 성당에서 달려가는 겁니다. 한 사람이 파견되어서 산 너머로 가서 공소에서 그 강론을 읽어드리는 겁니다. 그날 복음과 강론을 거기에서 듣는거에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못드리니까 공소에서 듣는 겁니다. 큰 미사 때, 부활이나 성탄 때에 성당에 오는 겁니다. 그래도 그들은 냉담을 하지 않아요. 그래도 그들 중에 순교자가 나와요. 신기하죠? 제가 맨날 강론이 시원찮아서 그런가? 


다르다!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들이 살던 세상과 다르다는 것.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무관심할 때, 그 중에서 냉담자가 생기는 겁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에게 꼭 영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유대관계를 맺었을 때 그 안에서 순교자가 나오게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은 참 고달픈 삶이었어요. 우리가 그 분의 업적을 보면, 참 지금 세대에 태어났으면 훨씬 더 큰일을 하고 훌륭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지만 The End. 끝난거죠. 그 분은 그 시대에 사셨으니까. 그 시대에 최선을 다해 사시고, 적어도 그 시대에 가장 행복하게 사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았으니까. 신앙 안에서의 행복. 그 분은 그것때문에 사제가 될 수 있었고, 그것때문에 순교의 길로 갈 수 있었고, 그것때문에 힘든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은 바로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았고, 또 많지는 않았겠지만, 15살에 사제가 되고 스물 다섯살에 돌아가셨으니까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그런 가르침과 어떤 유대감 서로에 대한 그 시대에 지녔던 공동체의 일치감! 이런 데서부터 김대건 신부님은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사는 이시대에 이 강론을 하면서 많은 경우는 성당에 오지 않고 문 밖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도록. 지금은 공동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예전에는 동네라고 하죠. 마을, 우리동네 또는 교우촌. 신자들끼리 많이 모여사는 곳. 그런 곳에서 유대를 맺고 살았는데, 이 시대에 우리는 이런 저런 식으로 다른 유대를 맺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면에서 공동체 문 밖에 있는 신앙인들을 우리 안으로 자꾸 끌어안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무관심하게 내치지 않고,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믿음이 있고 복음이 있고 신앙이 있으며, 그런 것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도 지금보다 더 새로운 모습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들끼리 더 마음이 통하고, 더 알고, 챙겨주고, 서로 더 손을 잡아주고 이끌어주는 공동체로서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결심을 하는 존경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2015-7-5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미사.
전민동성당 방경석 알로이시오 주임신부님 강론말씀 끝.

당일 신부님 말씀을 녹음하여 재정리한 노트이므로 실제 말씀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강론 내용중 소개된 인물 소개

이인하 베네딕토 대전교구 신부님(1925~2011)

1925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 동성상업학교와 가톨릭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2년 서울 명동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공세리, 장항, 천안 오룡동, 대흥동 주교좌 본당 주임을 지냈고, 이후 총대리 겸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원장, 서산 동문동 본당 주임을 거쳐, 도마동 본당 주임을 마지막으로 1996년에 은퇴했으며, 2011년 10월 30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이인하 신부는 정년퇴임 후 건강이 악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대흥동성당 등을 다니며 고해성사를 지속적으로 해준 바 있다. 대흥동성당 사제들은 당시 이인하 신부의 건강을 엄려해 고해성사를 무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한 사람에게라도 고해성사를 더 줘야한다"면서 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장지는 대전가톨릭대학교 내 하늘묘원.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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